3ㆍ1운동 등에 참가한 신자들은 피억압민족의 한 일원으로 참여한 면도 있으나 안중근 의사처럼 대부분 독실한 신앙인으로 참가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맡겨진 하나의 과업이라 할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의 교회기관과 전문학자들이 개괄적이나마 연구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참여한 평신도와 성직자들의 활동상을 소개한다.
천주교 신자들의 민족운동 참여는 무장 독립투쟁과 3ㆍ1운동 등의 평화적 운동, 그리고 교육사업과 같은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나뉘어진다. 이 중 무장독립투쟁은 살인을 수반한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단죄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법과 교회의 주요 문헌에는 국가 간의「방위전쟁」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시각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무장독립투쟁
대표적인 인물은 안중근 의사이다. 안 의사는 을사보호조약 이후 황해도에서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세웠으며 그 후 연해주로 가서 독립군을 일으켰다. 1903년 하얼삔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실했다.
거사 전 탄환에 十표시를 새긴 것이나 거사 직후 성호를 그은 사실 등의 신앙적인 자세는 유명하다. 1962년 대학민국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고 1979년 9월 2일 안 의사 탄생 1백주년 기념미사가 故 노기남 대주교에 의해 명동대성당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비슷한 시기인 1908년 전명운은 샌프란치스코에서 대한제국의 친일파 외교고문 스티븐슨을 사살했다.
한편 1910년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황해도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당시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殺)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윤치호ㆍ양기탁 등 민족운동의 거물 인사 1백5명을 구속했는데 이때「105인 사건」의 주모자는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다.
또 이 사건과 연루돼 15개월간 복역한 평신도 지도자 이기당은 복역 후 만주에서 광제회 등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대대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외 단체로는 간도의 의민단(義民團)이 유명하다. 이 단체는 천주교 신자들로만 구성된 독립군조직으로 2백여 명이나 되었다. 대장은 방우룡, 부대장은 김연.
3ㆍ1운동
3ㆍ1운동이 일어나자 교회 안에서는 먼저 서울과 대구의 신학생들이 가담했다. 서울신학생들은 교내 만세시위에 이어 가두진출까지 했으나 대구는 거사 직전 선언문 뭉치와 태극기가 학교 측에 발각돼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 뮈뗄 주교는 주동자를 퇴학 처분했으며 대구 드망즈 주교도 7개월간 학교 문을 닫는 조처를 취했다.
평신도들에 대한 자료가 대단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들도 전국 주요도시에서 만세운동에 대거 참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제 측 기록에 의하더라도 서울ㆍ원산ㆍ평양ㆍ대구 등 7개 도시에서 53명의 천주교 신자가 수감된 것으로 나와 있다.
특히 대구 시위의 경우 평신도들은 시위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가톨릭재단인 해성(海星)학교 교사 김하정은 3ㆍ1운동 경북조직부장으로 맹활약했으며, 당시 대구교구 원로 평신도이며 해성학교 주인 김찬수의 저택은 운동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 것이다.
대구 시위에서 유흥문ㆍ손명조 등 20여 명의 명도회(교구청년회) 회원들과 적지 않은 해성학교 학생들이 검거됐다
또 현재 서울 정릉본당 주임 김창만 신부의 외조부 장규섭은 홍해도 장연본당 부설 경애(敬愛)학교 교사로 있을 때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집에 태극기를 꽂게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 황해도지방위원으로 활약,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돼 징역 5년 8개월을 살기도. 장규섭 의사에게는 1977년 상해임시정부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성직자로는 윤예원 신부와 공베르 신부 등이 적극 가담했다. 황해도 은율본당 윤예원 신부는 만세시위에 가담했을뿐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참가 권유서「천주교 동포여!」를 5백여장 배포하기도 했다.
안성본당 초대주임 공베르 신부도 만세시위에 가담한 신자 및 군중들을 성당 안에 숨겨 주었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3ㆍ1운동 뒤에도 일부 한국인 신부와 신자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으며, 1921년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될 때는 천주교 대표를 파견, 곽연성이 천주교 대표로 선임되기까지 했다.
애국계몽운동
1907년 대구교구의 평신도 유지 서상돈은「국채보상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 금연운동 등을 통해 일본의 차관 1천3백만 원을 반환하는데 앞장섰다.
또 천주교는 학교 설립 등 교육사업을 통해 문맹퇴치와 애국계몽사상 보급에도 힘썼다. 1910년 당시만 하더라도 전국 54개 본당에 1백24여개의 사립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외 한글 성경과 교리서출판을 통해 일제하 우리 민족의 얼인 한글을 보급하는데 앞장섰으며, 경향잡지 등의 교회간행물에서는 신분제의 부정, 인간의 기본권 강조, 여성지위 향상 주장, 아동의 인격 강조 등을 통해 근대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金基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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