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톨릭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교회당국은 교회 본연의 사목에만 충실하려고 하였으나 안중근 의사를 비롯、많은 평신도와 일부 성직자까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왜곡 또는 등한시 돼온 이러한 사실 가운데 독립운동가 故 장규섭(바오로) 옹의 활동은 가톨릭신자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해 왔는가를 입증해주고 있다. 장규섭옹의 딸 장기특(체칠리아ㆍ82) 여사를 통해 그의 민족독립운동 실상을 알아본다.
『내가 13세 때였던 그 기미년이 70년이 지났건만 그 당시 겪은 일들은 엊그제 일같이 생생하기만 합니다』
장 여사는 3ㆍ1절과 광복절이 다가오면 더욱 기미년 당시와 선친에 대한 생각이 난다며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장 여사의 선친인 장 옹은 황해도 장연읍을 중심으로 학생 교육과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을 통해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로서 지난 1977년「대통령 표창」을 수상、정식 광복회의 일원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1884년 3월 24일에 출생한 장 옹은 집안 형편으로 인해 15세 때부터 교사와 학업을 동시에 해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유독 탐구열이 강해 야학과 몇 군데의 학교를 전전하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고 장 여사는 전했다
학교와 인연이 많았던 장 옹은 장성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가와 민족 노래를 가르치는 방법을 통해 조국 독립의식을 고취하다 여러 번 적발「요주의 인물」로 간주됐다.
이런 행동 때문에 일본인 교장과 다툴 수밖에 없었던 장 옹은 결국 학교를 그만 두었지만 천주교에서 경영하는「경애학교」에 초빙돼 이곳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장 옹의 가족은 3ㆍ1절을 맞이했다고 한다. 『3월 1일이 지나자 선친은 잡혀 갔지만 곧바로 알리바이가 성립돼 석방됐어요.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이 근처 마을 집집마다 태극기를 꽂게 하고 만세를 부르도록 했는데 어떻게 석방됐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 후 아버지가 군자금 조달로 체포됐을 때 비로소 당신이 계속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알리바이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또한 장 여사는 3ㆍ1절 이후의 상황에 대해『3월 1일 이후 장날마다 만세가 터져나와 일경들이 사람들을 무차별 체포해서 때리고 쑤시고 꺼꾸로 달아매고 물을 먹이는등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자행했었다』고 전했다.
3월 1일 이후 장옹 은 일경의 압력으로 경애학교를 그만두고 읍에서 30리 가량 떨어진 산골로 들어가게 됐지만 여기서 또 다시 서당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다 체포、 옥고를 치루게 됐다.
이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중「자금 출자한 명부」가 마을에서 적발、이 명단에 기재된 인물들이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근 마을에 있던 웬만한 남자들은 모두 체포되었어요. 그래서 마을주민들의 항의와 원성을 무척 받았고、그 이후 우리 가족은 끼니를 잇기조차 힘든 상황에 봉착하게 됐지요』
장 여사는 그때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장 옹은 이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애국가 건으로 8개월、군자금 건으로 5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장 옹은 출감하고도 직업을 구하기 힘들었으며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11월 60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장 여사는『광복되던 날 사람들은 거리에서 기쁨에 겨워 만세 환호를 지르며 다녔지만 나는 선친께서 그렇게 원했던 조국광복을 바로 얼마 남겨두지않고 타계하셨다는 생각에 기쁨 속에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며 광복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장 옹은 독립운동과 함께 성당 일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선친께서 학교를 사임하게 됐을 때 신부가 강론을 통해「양팔이 잘리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장 여사의 증언에서도 엿보이듯이 장 옹은 성당 내의 서당을 학교로 발전시킨 것을 비롯해 여자들에게는 편물을、수녀들에게는 교사자격증을 딸 수 있도록 지도하는등 교회활동에도 엄청난 정열을 쏟았다.
이런 부친의 영향 아래 성장한 장 여사는 자식들에게도 같은 유산을 물려줘、슬하에 있는 7남매 중 장남인 김창만 신부(서울 정릉본당 주임)와 여섯째 딸 김경희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또회) 그리고 외맏손자인 전태준 신부(서울 영등포본당 주임)가 성직자와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한편 항상 부친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을 잊지못하던 장 여사는 지난 80년 2월에「3ㆍ1운동과 부친을 생각하며」라는 회고록을 작성、선친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 바 있다.
<許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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