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공회 서울교구장 이천환 주교가 1974년 새해를 맞아 본사에 보내 온「한국 교회의 자기 발견」이란 주체의 내용 전문이다.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발견의 문제를 깊이 의식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대내적으로 온갖 난제들을 안고 있는 한국의 교회는 오늘의 역사적 현실과 내일에의 기대를 가장 심각히 묻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교회를 별천지의 세계로 이해하려 했고 또 그 정도로 교회를 가볍고 약하게 취급하려 한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자들 자신도 교회의 사명을 비세속화의 세계에서 구하려 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늘의 구원과 복을 설교하는 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주요 사명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은 교회가 그들의 생각처럼 조용하고 부드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사회의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사회 정의를 위해 발언하고 또 민족의 어느 일원 못지 않게 호국적인 선언과 투쟁을 하는 기관이 교회라는 것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가 서구로부터의 피선교 교회로 살던 시대에는 배운 것이 대부분「순종」이요 또 사회 도피적이었다. 불만이 있고 불공평한 일이 있어도 그저 참는 것만이 덕이었고 또 신자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쳐야 옳다고 믿기까지 했다. 사실 초대의 어느 선교 단체들은 의식적으로 피선교지의 신자들을 비계몽 상태에 방임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의 정책이었다. 피선교지의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 또 신학을 공부하면 그들의 선교정책에 난관이 많을 것을 염려했다. 그들은 반항이나 비판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과 인내만이 교회의 미덕이라는 사고방식은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가 되어 버렸다. 무엇이나 무조건 남이 전해 준 대로 따르거나 오랜 전통대로만 반복해야 한다면 식민지의 백성은 늘 착취를 당해도 참으며 내세의 위로만 기대해야 할 것이다. 또 인종 차별을 받고 있는 유색 인종들은 침략을 당하고 학대를 받아도 체념하고 순종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면 우리 민족의 비극적 분단상태도 주어진 상태대로 참고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정신은 결코 그런 맹종과 맹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의 윤리이다.
한국 교회는 최근 수 년간 여러 면에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발전되고 있다. 참된 것과 옳은 것을 발견하고 량심의 부르짖음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선 우리 한국 교회의 지성적인 자각과 도덕적인 책임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 사실을 발견했다.
교회는 우선 양심을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허울과 허세와 허영과 가식은 양심을 모독하는 악 중의 악이다. 억압 허위 거짓 사기 역시 양심의 적이다. 이것들은 여하한 목적으로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 악의 요소들이 양심을 가리고 또 그런 것이 사회 풍조가 되면 그 결과는 너무도 명백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권과 권력을 얻으려 하는 까닭이 어디 있는가. 양심과 정직이라는 말이 오히려 어리석은 말로 들리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결국 빈부의 격차는 극대화될 수밖에 없고 권력의 횡포는 극심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자기 발견을 한다는 것은 이런 거짓과 기만의 악들을 밝혀 비판하고 그런 악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교회의 신자는 결코 별개의 인간이 아니다. 그들 역시 사회의 일원으로 사회의 각 부분에 종사하고 있다. 교회의 목사나 신부도 별개의 인간이 아니다. 그들이 보고 만나는 인간, 또 그 자신이 경험하는 대상들이 모두 세속사회 속에 있다. 그렇다면 사회와 세계를 떠나서 교회 사명이 성립될 수 없다. 교회의 자기 발견이란 사회에 대한 불단한 참여와 이에 대한 양심의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교회 전체 안에서 새로운 자기 발견이다. 우리는「교회의 전통」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지만 그 뜻을 깊이 생각해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전통과 풍속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어떻게 발전해 왔다는 것을 모른다. 이것은 과거에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비판이란 참된 것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다.
비판 없이는 잘못된 것이 밝혀질 수 없고 고쳐질 수 없다. 잘못된 것을 오히려 옳은 것인 줄 믿고 여기에 열심까지 더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특히 보수적인 경향이 많기 때문에 비판이 결여될 때는 다른 어느 기관보다도 완고한 단체가 되기 쉽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에 관한 비판적인 학문이다. 교회 안에 신학이 없다면 또 신학이 있다 해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교회의 내용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판 없이는 성서도 교회의 역사도 또 사목의 사명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잘못된 신학의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어떤 완매한 성직자 중에는 아프리카의 흑인이 백인에게 예속되는 것을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논포는 흑인이 그의 부친인「노아」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부친의 하체를 부끄럽게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데 그 저주의 내용은 자손만대까지 그의 형들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함」의 자손이 실제로 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의 형들인「셈」과「야벳」의 자손들은 구라파와 중동 지역에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때 백인들의 식민지 통치에 가장 적절히 이용될 수 있었던 이런 거짓 성서 해석은 실로 무서운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더 잘못되고 어리석은 것은 식민지의 인종이나 천대 받는 약한 인간들 중에서까지 그런 거짓되고 조작된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을 못 배웠거나 배웠다 해도 잘못 배우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짓밟고 학대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성서의 말대로 표현한다면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자기 발견이란 이런 무지와 거짓에서 해방되는 노력이다. 교회 안에는 새롭게 발견되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성서 이해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의 예배 형식 혹은 성직 전통에 대한 미신 등 혁신해야 할 것이 많다.
이상 교회의 자기 발견에 관해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모두 참된 것 옳은 것을 위한 새로운 검토이며 비판이다. 하나는 사회를 향한 양심의 부르짖음이었고 또 하나는 교회의 그릇된 전통에 대한 비판이었다. 무엇이든지 옳은 발견에 따르는 결과는 새로운 출발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그 비판적인 발견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요구하고 있다. 아직 무지 속에서 각성치 못한 교회는 자기의 위치를 철저히 발견해야 할 것이요 그 위치를 발견한 교회는 용기 있는 자세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위대한 시점을 찾고 있다.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살려낼 수 있는 중대한 시점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3ㆍ1 민족운동의 바탕도 민족의 자기 발견의 소산이며 종교는 이의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 74년의 우리의 교회가 바로 이런 문제들을 연구하며 자각해야 할 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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