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좀 다녀온다는 사람이 웬 계집애를 넷씩이나…. 하는 의아한 눈초리로 내 아래위를 훑어봤고 나도 사실 쑥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게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이시죠?』하고 입을 모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어머님 제 동생들…버스 속에서 주웠어요』
어머니는 정신없이 오인분의 저녁식사 준비를 했고 우린 염치없이 먹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쩜 그렇게 시종일관 미소를 보이셨는지 지금도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내가 이젠 성숙한 아들로서의 대접을 받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들에게 우선 내 십 개월 동안의 생도생활을 한 장씩 보여 줬다.
귀한 순간들이 한 장의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어떤 의식, 즉 시간을 베껴놓을 수도 있는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는 그것 자체를 뭐 커다란 자랑거리나 되는 것처럼 우쭐거려지는 마음이 옷깃을 제치고 밀려 나왔다.
그녀들은 이마를 맞대고 감탄하면서 쑥덕댔다.
모든 것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다.
핀 꽃은 좋은 법이다. 그러나 그게 망울을 열기까지의 인고에 대한 무한한 억누름을 좋아해 주고 알아 주는 이는 별로 없다. 다만 그 아름다움을 칭찬할 뿐.
그것처럼 나도 그 종잇장 속에서 씩씩한 군인답게 웃기 위하여 고된 훈련과 시련을 이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계혹해서 더 얼마 동안인가를 서 있어야 했다.
『우리들은 무척 친해요』
『무슨 써클 같은 것이라도?』
『아뇨 그런 것 없어요. 우린 모두 형젠 걸요』
모두들 눈으로 이 대답에 동조하는 그녀들에게서 나는 아직까지 전혀 맡아본 적이 없는 어떤 냄새를 맛보았다.
눈에 푹 쌓인 겨울산을 동반하노라면 어떤 때에 재수가 좋으면 에델바이스를 구경할 수 있는 산이 있다.
한라산.
그 산에서 나도 꼭 한 번 단체가 싱싱한 등반대에 끼어서 겨울산을 탔다가 선배께서 찾아낸 그 인고의 꽃, 그러나 청초한 그 꽃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고상했던 마음보다도 더 짙게 더 깊이 그러나 그때의 기분과 흡사하면서도 김이 빠진 듯한 글쎄, 새삼스럽게 내가 어떻게 그걸 설명하겠다는 것일까.
『우린 처음에 다섯이서 자살클럽을 만들었어요』
점점 더 말은 그들나름대로의 독특한 뉴앙스를 지니고 내게 쏟아내렸다.
『자살클럽? 그럼 당신들 전부 땅 속으로 들어갈 날이 얼마 안 남았군』
『그래요 정말 산다는 게 시시하게 보였고 그래서 별스러워지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젠…』
『이젠 죽는 게 두려워졌어요? 아마 보이 후렌드라도 생겼나?』
『어머 정말 두꺼비 같은 말씀만 하시네요. 차니 때문에 우리 목적이 바꿔졌을 뿐이에요. 보이 후렌드는 뭐 말라빠진…』
『차니? 거 묘한 이름이군요 어떤 인물인데 위대한 목적을 바꿀 수 있었을까?』
『흥, 위대하다는 말이 좀 거칠지만 괜찮아요. 아까 정류장에서 집에 돌아간 그애예요. 그애가 써클 같은 것 싫다고 해서 우린 아예 형제가 되기로 했어요.』
일 개월 전에 서울에서 전학해 온 소녀가 바로 차니였단다.
별로 예쁘지는 않았지만 하얀 살결이 제주도 여성들은 하얗다기보다 투명한 살결을 지니고 있으니까 꼭 서울 아이인 것만은 분명하더란다.
인사 소개를 할 때 무엇인가 입을 쫑긋거리며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일 때 살프시 내려뜬 눈에서 눈물 같은 것이 금방 쏟아질 것만 같은 연약한 풀꽃을 생각키우는 그런 강한 인상 때문에 자기들은 차니를 포섭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고 했다.
상상 외로 딱 잘라서 써클 같은 거 싫다는 그녀를 그냥 버려둘 수가 도무지 없어서 그럼 너 좋을 대로…의 결과, 저희들은 한 형제처럼 서로 위하고 남을 위해서 나를 죽어 주자는 좀 어려운 제안을 그녀는 했고 되씹으면 되씹을수록 그 말이 좋아서 자기들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말을 자랑스럽고도 천진스럽게 그녀들은 했다.
정말 단순한 이야기였다.
애벌레 시절이 지나서 탈바꿈을 몇 번 한 후에 나방이가 되는 게 타당하고 쉬운 것처럼 그녀들의 이야기는 당연한 것에서 고개를 끄덕인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차니에 대해서 호기심을 누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서울에서 전학해 온 차니, 그 차니가 이렇게 해군사관학교에 관해서 알고 있을까? 그녀들 말마따나 풀꽃처럼 약한 소녀였다. 뭐 똑바로 한 번 쳐다볼 기회조차 없었으나 차속에서부터 벌써 나를 교육하던 그 목소리에 대해서 나는 좀 더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강박관념을 가졌었는지도 모른다.
『차닌 이곳이 고향인가요?』
『글쎄요. 큰아버지 집에 산다고 했던데요』
『부모님은?』
『잘 몰라요. 걔가 이야기 한 적두 없구요. 저번에 딱 한 번 물어봤었는데요 아베ㆍ마리아로 대답하던 걸요. 잘 불러요.』
아베 마리아(Ave Maria)?
슈베르트? 구노? 어느 아베 마리아가 그녀에게 부모님을 대신해 주고 있을까? 어느 것일까?
내가 더 물어 볼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정말 나는 어린 청년이였으니까-.
(J여고 제이학년 민찬)
그녀들이 내 책상 위에 남기고 간 자기들 프로필에는 고맙게도 곁들여 차니의 그것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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