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소대장이 전사한 후 3소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종대장으로부터 연대 본부와의 일체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 아래 후퇴를 결심했다는 이유를 들은 다음 우리는 세밀하게 후퇴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살 수 있다」란 생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갖고 기뻐했으나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즉 그때 내 벙커 안에 3명의 인민군 포로가 있었는데 이들 포로의 처치문제였다. 그 당시 우리가 처해 있던 전항으로서는 도저히 이들 포로를 데리고 철수할 수 없었다.「○」지점으로 철수하는 경로에는 적의 대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고 따라서 교전도 각오해야만 했던 우리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의논 끝에 포로들을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 포로들을 심사하고 감시하는 책임을 갖고 있었던 탓으로 이들에 대한 총살 집행권을 받게 되었다.
3명의 포로 중 한 명은 상위(上尉)인 장교였고 나머지 2명은 하사관급 병졸이었다. 이 장교의 성은「김」이라고 했으며 오른쪽 다리에 가벼운 상처를 받고 있었고 두 병졸은 각각 복부와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이들 두 병졸의 운명은 죽기 직전의 생명 같았다. 복부에 상처를 받아 창자가 터져나와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이 인민군은 악질에 속하는 지독한 놈이었으며 죽어 가면서까지 우리 국군을『민족 반역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상위는 조용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으며 그야말로 장교의 품위와 위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부상 당한 자기 부하들을 구출하려다가 부상 당해 결국 포로가 되었었다.
철수 준비를 완료하고 이 3명의 포로를 대했을 때 나는 별안간 이들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앞으로 세 시간 후면 총살 당할 이들의 운명을 생각하니 적이란 개념을 초월해 인간과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 내 마음에 자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20대의 젊은이들이었고 나를 사랑하는 여인이 나에게 있는 것처럼 어쩌면 그들이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여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후 총살 당할 그들의 운명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나 자신의 운명을 예감시켜 주는 듯했으며 이와 같이 전투원이란 같은 운명의 길을 걷는 동지의식을 강하게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또한 내 민족이며 내 형제들이 아닌가. 그들의 성도 김ㆍ박ㆍ노 라고 하는 우리 겨레의 성이 아닌가. 이상과 같은 심정 아래 나는 그들에게 진정 무엇인가 해주고 싶었다.
그날 저녁 나에게 먹을 것이라고 남아 있던 것은 된장 깡통에 말라 붙어 있는 된장을 긁어 모은 된장 가루 한 숟갈뿐이었다. 이 된장 가루로 나는 숭늉 비슷한 된장차를 철모에 끓여 인민군 포로들과 함께 마시기로 했다.
잠시 후 우리는 된장차를 나눠 마셨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시베리아의 사나운 바람은 여전히 눈바람을 벙커 안으로 휘몰아 보내고 있었고 촛불은 쉴새없이 까불고 있었다. 가끔 떨어지는 포탄 작열에 진동되어 벙커 천정에서 흙가루가 쏟아져 된장차 철모 안에 떨어졌다. 추운 탓인지 김상위의 얼굴에는 잔소름이 번져 있었고 잔솜털이 오뚝오뚝 서 있는 것이 희미한 촛불에도 뚜렷이 보였다. 그의 두 눈은 빛나고 있었고 내가 촛불을 켰을 때부터 무엇인가 깊이 상념하는 시선으로 촛불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이 초가 다 타 없어져 촛불이 꺼지기 전에 내 생명이 소멸하겠지…』
『무엇이라고?』나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고 인민군 포로를 포함한 우리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못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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