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잊어 버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생동하고 동시에 정지해 버리는 생도생활이 나의 전부를 멀리 유배 보내 버리고 말았었다.
하찮은 순간이 귀중하다는 걸 진작 알아볼 아무런 계기도 없이 어이없게도 나는 옥포만의 잔잔한 물 속에서 첨벙대며 물장구를 치느라고 동심 같은 것에 심취해 버리고 있었다.
젊은 혈기로 그린필드를 누비는 럭비가 조그만 계집애에 대한 수수를 뭉개 버리고 땀에 젖게 했으며-여름방학 때도 나는 얼마나 열심히 합숙훈련을 했는지 때에 따라 가끔씩 열리는 심심찮은 미팅에서 만나는 공작 깃털처럼 화려한 여대생들로 내 기분은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답답해서 한 순간에 지나지 않은 얇은 추억을 소생시키려고 노력하겠는가.
자연히 나는 모든 걸 잊어 버리는 것에 아무런 애석함도 느끼지 못한 채 나날을 연기처럼 후딱 보내 버렸다.
내가 손을 흔들어 주며 어서 지나라고 한 건 아니지만 아무 것도 남겨둔 것 없이 시간들은 지나 버리고 다시 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절 가을이 왔을 때 아주 싱거운 사건 때문에 나는 나의 마음과 온통 지나 버린 시간들을 뒤져서 내가 잃어 버리고도 조금도 몰랐던 귀중한 것을 찾아내야만 했다.
연례행사의 하나로 음악회「옥포의 밤」이 열렸었다.
시내 모여고에서 초청을 받고 온 여학생이 몸짓을 우아하게 모으고 익숙한 솜씨로 바이얼린의 현을 쓰다듬으며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켤 때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 그 쓰라린 듯하면서도 손을 모둡게 하는 음향이 어느새 한 소녀의 목소리가 되어 내 귓가에 앉으려고 애쓸 때 나는 느꼈다. 찾아야 된다고 그것도 빨리 어디쯤에서 누군가 하는 걸 전부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러나 어려웠다.
나의 추억은 미팅의 여대생이 럭비가 푸른 돛을 높이 치켜 단 요트가 전부였다. 그 이상은 절대 내 마음을 뒤진다 해도 정말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내 마음을 뒤흔들어 메아리 되게 하는 아베마리아를 찾아내어야 할지 끙끙대다 보니「옥포의 밤」은 끝나고 칭찬의 말과 콜라로 건배하는 파티가 시작되어 있었다.
음악당과 파티 장소인 생도 휴게실까지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도무지 의식하지 못하고 음악당에서 휴게실까지 자리를 옮긴 것이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폭소가 쏟아지는 속에서 나는 몹시 외로왔다.
고독 때문에 몸이 뒤틀리는데도 머리 가득히 아베 마리아는 넘쳐나서 마음으론 옥포만보다도 더 푸근한 물결을 이루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웃고 또 마시기도 하고 이야기도 했다.
문득 머리를 들었을 때 눈에 가득 차게 들어온 조금 전의 여학생에게서 나는 묘한 생각을 해냈다.
나는 서슴찮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사학년 생도 음악부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즐겁게 웃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이분에게 용무가 있어서요』
『그래요? 얼마든지』음악부장은 쾌히 동석하기를 승락해 주었다.
『이 학년 생도 유진입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정말 좋았어요』
『이 생도 그러고 보니 인사차 오셨군』음악부장은 내 말꼬투리를 얼른 잡아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너무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내게는 그 말에까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아베 마리아를 노래하는 목소리를 알고 계십니까?』
손을 비벼대며 초조히 말을 끝낸 나를 그 테이블의 사람들은 둥그래져서 쳐다보더니 순간 어이없다는듯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웃고 난 그 여학생은 깔보는 억양으로 그러나 부드럽게 힐책하듯이 말했다.
『어느 유명한 성악가의 이름을 아시려구요?』
『아뇨 소녀입니다』
『아이 참 그럼 아베 마리아를 노래하는 목소리가 따로 있어요? 저도 부를 수 있어요』
『아닙니다. 바이얼린이 아니고 목소립니다』
그녀가 아베 마리아를 노래할 줄 아는 목소리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다.
역시 그 목소리는 내 추억에서만 되살려져야 하는 단지 내게만 존재하는 목소리라는 걸 의식하며 머쓱하게 테이블을 물러나왔다.
그날 밤 옥포만의 물살은 가을답잖게 시원했다.
나는 파-티에서 생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실수를-오로지 음악부장의 판단이었지 나는 그걸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조금도 없이 완전한 타의에서 이루어진 한 때문에 음악부장으로부터 4킬로메타 이상이나 되는 거리를 뛰어야 하는 기압을 받고 마지막으로 옥포만에 뛰어들어 백 미터를 배영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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