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제자들과의 대화로 결론을 짓고, 이 결론은 예수님 농사의 추수마당이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세상이라는 지적으로 끝난다.
사마리아 여인은 서먹서먹하게 시작했던 외간 남자 예수와의 대화를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이 분에 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간지러움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말이 마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터에 예수의 일행처럼 보이는 다른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동네로 갔던 예수의 제자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 여자에게는 이 자리를 피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빨리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동이를 두고 간 것을 보면 다시 돌아올 참이었다.
제자들은 스승께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놀랐다기 보다는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랍비들은 여자들과의 쓸데없는 접근을 경계하고 있었다. 여자를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죄에 떨어진 것은 여자 때문이었다. 집회서는 이 사상을 반영하여『여자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팔지 말라…죄는 여자로부터 시작하였고 우리의 죽음도 본시 여자 때문이다』(25, 21~24)라고 하였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니,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등 여성 비하의 속담 속에 살던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또 현대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말대로 여성의 윤리감각은 남성의 윤리감각과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육적인 세계를 뚫고 영적인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예수의 전망을 바라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 나야 하는 영적인 생명의 설교 때도 그랬지만 그들은 알아듣지는 못하고 막연하게 스승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 영적인 생명으로 태어나면 유대아인이다, 그리스인이다 따질 것도 없고 노예와 자유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갈라3, 27~28). 이 가르침이 표면화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시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바로 그 사도들은 지금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이 혁신적인 여인관을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여자와의 대화에 대해서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 의심을 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께『뭐 좀 잡수시지요』하고 권하였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영원한 생명의 물을 가르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도 영적인 세계의 양식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셨다. 「생명의 빵」에 관한 교설은 이들이 요한복음 6장에서 자세히 듣게 될 것이다. 지금은 육신생활에 젖어 있는 그들의 귀를 영적인 세계의 사정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련시키는데 그친다. 이 영적인 양식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께서 극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단식 끝에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때의 말씀을 상기하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 4 : 신명8, 3)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는 완곡된 비유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 설명하신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너희들이 해야 한다』라고 허기와 조갈에 지쳐있던 스승께서 먹을 것을 앞에 놓고 하시는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실감나는 것이 마음에 와 닿았다.
바로 그때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를 만나러 오는 사마리아인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예수와 대화를 나누던 사마리아 여자는 동네에 들어가 필립보가 나탄나엘을 찾아가서 전하던(요한 1, 45) 것보다 더 신앙적인 말로 동네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한 일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것 같은데 가서 봅시다』라고. 그들은 여인의 말을 듣고 모여들었고 예수께서 그들과 이틀 동안 묵으시는 동안 예수의 말씀을 듣고 이 분이야말로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유대아인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고, 그들의 랍비인 니꼬데모는 예수와 장시간 대화하고도 그분이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기가 힘들었다.
사마리아인들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 일을 완수할 추수의 대상이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개의 격언을 들어가며 설명하신다.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할 때가 됐다』라고 재촉하시며 농사의 기쁨(예수의 구세사업은 이렇게 농사일에 비겨 말씀하신다)을 일깨워주신다. 「씨뿌리고 넉 달 후면 추수다」라는 격언은 이스라엘인들의 게제트역세에 따라「씨뿌리는 달 두 달, 추수하는 달 두 달」에서 온듯하지만「참고 기다리면 기쁨이 온다」라는 격려의 격언이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농사는 씨뿌리자 추수의 기쁨이 온다.
『저 밭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지 않았느냐』는 첫째 격언과 이어지는 둘째 격언의 상황은 해석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이번에는「씨뿌리는 사람 다르고 거두는 사람 다르다」라고 하며 씨뿌린 사람과 거두는 사람을 구별하고 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이 거둔다」라는 우리의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투의 말은 구약성서에도 여러 번 나온다(신명20,6ㆍ28,30 : 욥31, 8 : 미가 6, 15). 물론 제자들은 복음의 씨를 뿌린 적이 없다. 예수께서 뿌린 씨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런데「남들이 수고하여 지은 곡식」이라고 한 남들은 누구들을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그 곡식을 거두라고 너희를 보냈다」고 했는데 언제 그런 파견이 있었는가. 이 어려움은 사도요한이 예수의 사마리아 전도를 기술하면서 사도시대의 사마리아교회 상황을 예수의 전교정신에 입각하여 쓴 것으로 해석하면 풀린다. 사도시대의 사마리아 전교는 씨뿌린자 다르고 거둔자 다르다. 이 지방은 필립보가 씨를 뿌렸고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성령을 내려 주었다(사도8장). 사도시대에는 누구의 교회냐라는 것이 심각하게 문제된 적이 가끔 있었다. 사도 바오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내가 심었고 아폴로가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다』(고린3, 6)라고 하였다. 「씨뿌린자 다르고 거두는자 다르다」라는 예수의 전교정신은 그 후 교회생활의 법규처럼 된 아름다운 속담이다. 수고하며 성당을 짓고 홀연히 떠나는 본당신부가 그렇고, 미개의 땅에 전교하고 그 나라 사람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외국선교사들이 그렇다.
백민관 신부
<서울가톨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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