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깊이 생각하는 때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처형당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아니 바로 하느님이신 그분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알고 섬긴다고 스스로 자처했던 사람들이었다. 살진 짐승을 잡아 바치며 하느님을 섬겼지만 그들은 정작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몰랐다.
『이 땅에는 이 하느님을 알아주는 자 없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아)、『너희가 바치는 번제물은 거들떠보기도 싫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스)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애타는 하소연이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 그것은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주고 법과 정의를 펴는 것이요(에레26、6)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곧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이를 섬김이다(마태25、40).
성서 전편을 꿰뚫고 있는 중요한 테마는「하느님 나라와 가난한 자」의 특별한 관계、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애정이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이란 과연 누구이며、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생겨났는가? 성서는 가난의 근본 원인이 개인의 무능력이나 자연적 이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소외당하는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악한 마음의 소산인 사회정의 때문이라는 것이다(예언서 참조).
이제 오늘의 세상을 돌아보자. 온갖 초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21세기를 열고 있는 이 시대、바로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쌀 한 톨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면 농담이라고 말할 것인가? 부유한 나라에서는 개、고양이가 통조림 고기를 먹으며 살찌고 있는데.
가까운 우리 사회주변의 현실은 또 어떠한가? 아직도 많은 어린이들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밥을 굶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련되고 값비싼 가구로 장식된 50~60평의 드넓은 아파트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바야흐로 구제도시 서울에서 수많은 철거민들이 땅바닥、돼지우리、땅굴、비닐하우스에서 추운 겨울을 떨고 있다면 그들의 게으름 탓이라고 외면할 것인가? 『다시 태어난다면 결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창경원의 원숭이로 태어나고 싶다. 그들은 내쫓기지도 않고 잠자리가 있지 않은가』강제철거로 평생을 내쫓기면서 살아온 철거민 할머니의 피맺힌 탄식을 기구한 운명의 탓이라고 말할 것인가?
재작년 사당동 철거 때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울부짖으며 매어 달리던 철거민들을 빤히 바라보며 육중한 포크레인의 굉음에 박수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으며 바로 그날 산동네 좁은 골목길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자가용은 어느 귀한 손님들의 것이었는가?
도시빈민들의 가난과 고통의 원인은 분명 다른데 있다. 예컨데 서울시 땅의 60.7%를 소득상위층 5%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이 사회의 불의한 구조가 만들어낸 것이요、그 뿌리는 바로 인간의 욕심(소유욕)인 것이다.
인간들의 이 욕심、소유욕이야말로 하느님 보시기에도 참으로 좋았던 본래의 세상을 파괴한 장본인이다. 창세기의 원죄사건과 예수의 행적은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소유(선악과를 따먹음)가 인간에게 분열(저 여자가!)을 초래하고 고통과 죽음을 불러왔다면、이제 나눔(빵의 기적)은 인간에게 일치를 가져오고 생명을 준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삶의 양식을 말해주는 성체성사를 나눔의 성사ㆍ일치의 성사ㆍ생명의성사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나눔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예표인「함께 더불어 먹고 사는 식탁 공동체」의 기본정신이며 구체적 행위이다. 그런데 이 나눔은 내가 누릴 것을 다 누리고 남는 것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눔은 내가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의 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재산이나 권력이 보장해 주는 힘을 포기하는 것이다. 소외된 가난한 이가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하느님의 정의가 바로 서는 세상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대로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는 세상이다. 그 세상은 힘센 늑대가 힘을 포기하고 힘없는 새끼양을 잡아 먹지 않을 때만 비로소 가능한 세상이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초대받기를 원하는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 것이나 자캐오의 이야기는 결국 기득권의 포기를 의미한다(제가 말씀드린 재개발지역 딱지 안사기 운동은 이런 뜻에서이다).
이 시대、우리사회의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하느님의 목소리이며、가난한 이들은 곧 복음의 전달자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이 소외되지 않고 사회의 정치ㆍ경제ㆍ교육ㆍ종교의 판단 기준이 될 때만이 그 사회는 보다 하느님나라다움의 공동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기까지 철저한 나눔으로 부서진 예수의 죽음이야말로 모든 이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참 생명-해방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이다.
추영호 <신부ㆍ서울대교구 교도사목겸 도시빈민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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