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나운 바람에 떨며 춤추고 있는 이 갸날픈 촛불은 내 생명이 죽음에 임박했음을 상징하고 있소. 이 초가 다 타 없어지기 전 내 생명은 이 세상에서 존속하기를 그칠 것이요. 우리 3천만 모든 동포에게 행복을 보장하는 새로운 문명제도를 건설하고 통일된 조국 안에 평화와 부흥을 일으켜 불의와 부정, 착취와 굴욕, 빈곤과 비참을 몰아내고 우애와 평등과 행복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다짐한 이 사랑하는 조국에서 나는 꺼져가고 있는 이 촛불과 함께 소멸되고 있소. 얼마 후 동무들은 후퇴할 것이며 우리 셋은 충살 당할 것을 잘 알고 있소.』이상과 같은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별안간 그의 성실하고 선량한 표정과 또 그의 말 속에 숨쉬고 있는 강렬한 조국애 앞에 저항할 수 없는 일종의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김상위에 대한 동지적 이해와 동정과 우정을 막을 길 없었다. 내 마음 속에 그는 이미 내 적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 된 내 신앙심은 죽음 앞에 나선 한 불쌍한 영혼으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시키고 싶었다. 아니 죽음의 뜻만이라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란 종교적 신비성과 천상적 삶의 실체와 그의 존엄성을 대략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아니오. 죽음은 인간 존재의 만사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오. 물론 죽음은 당신의 육신을 파괴하나 당신이 조국을 위해 지녀온 이상과 실천해온 사랑을 파괴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이 시간까지 당신이 지켜온 정치적 이념이 어떻든 간에 당신이 우리 조국과 민족을 진정 사랑했다면 당신은 그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오. 사랑 자체는 영원한 것이며 이 사랑은 곧 천주님을 뜻하며 순수한 목적과 동기에 바탕을 둔 사랑은 그 사랑을 행하는 사람의 정치적 이념이나 이상을 초월해 천주님의 영원한 사랑에 귀착하는 법이오. 따라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쳐온 당신의 사랑은 천주님의 자비를 얻게 해줄 것이며 이 자비를 통해 당신의 영혼을 구제받을 것이오』『천주의 자비와 내 영혼의 구제…? 나는 그와 같은 나 하나만의 개인적인 구제를 단연코 거부하오. 우리 온 민족은 이 전란 속에 헐벗고 굶주리고 상처 입고 또 죽어가고 있는 이 판국에 어찌 나 하나만의 구제에 만족할 수 있겠소. 빈곤과 고통과 불행 속에 신음하는 내 민족과 함께 이 지상에서 살며 그들의 불행을 덜어 주고 싶은 마음뿐이오. 나는 천주의 존재나 또는 영혼이나 영원 따위의 존재성을 믿지 않소.그래서 나는 내 민족에 대한 사랑도 조국에 대한 이상(理想)도 죽음과 함께 파괴되고 말 것이라 생각하니 죽기가 억울하고 우리를 죽일 당신이 한없이 저주스러울 뿐이오』『당신의 그와 같은 주관적 고집을 초월해 천주님은 엄연히 존재하시고 계시며 또한 그분의 공의(公義)하심에 따라 새롭고 영원한 생명이 당신 안에 탄생되고 있소. 인간을 단지 이 자연현상의 우연한 존재의 하나로만 보고 이 시간성 안에서만 삶의 가치와 존재성 인정하는 당신들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은 보상할 수 없는 과오를 범했소. 우리 인간의 삶은 이 자연계의 시간적 개념을 초월해 천주님을 아버지로 또 천국을 본고향으로 살고 있는 영적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오』『인간이 무엇을 알고 믿는다고 그것이 반드시 존재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소. 인간의 주지적 사고(主知的 思考)로 추리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이런 것이다』라고 만일을 의심없이 믿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증명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런한 존재를 믿을 필요는 없다고 보오. 사실 그런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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