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오.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증명이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일종의 경솔이오. 우리는 사랑이나 우정이나 존경 등을 눈으로 볼 수 없어도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또 그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인간은 오늘과 내일이란 시간성을 초월한 행복과 평화에 대한 영원한 보장을 마음 속에 바라고 있고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에 대한 존재성을 증명해 주고 있소. 그리고 이러한 보장은 영원 자체이신 천주님 안에서만 가능하며 천주님이란 이 영원성을 얻기까지 인간은 초조와 불안과 고통 속에 방황한 것이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영원을 향한 질서이며 또 인간 심저에 내재하고 있는 영원에 대한 향수는 이 질서를 향한 우리의 고달픈 발걸음에 힘주고 있는 법이오』『동무가 말하는 것처럼 비록 인간 심저에서 영원에 대한 향수가 내재하고 있고 이 향수를 통해 인간은 영원성에 도달하는 영적 존재라 하더라도 나는 나만의 개인적인 행복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천국이나 영원을 단여코 거절하겠소.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상부상조하며 또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 사랑하며 동고동락하는「공동체의식」안에 하나의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더 나아가 같이 일하고 살다 같이 고생하고 죽는 이 지상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소. 좀 더 내가 살 수만 있다면… 조국을 위해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죽자니 억울할 뿐이오. 정말 살고 싶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정말 살고 싶소.』
그리고 그는 그 어떤 숭고한 이상적 목적 앞에 다달았다가 순간적으로 패배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와 같은 분노와 애석과 슬픔을 내포한 표정으로 바람에 여전히 한들거리며 허덕이고 있는 촛불을 주시하고 있었다. 촛불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그의 두 시선은 무섭도록 살아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어느 사이 땀방울이 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의 이러한 표정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신비성과 진실성으로 조화돼 있었고 내 마음 속에 막을 길 없는 친밀감과 존경심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고 천주님과 영원성을 부정하는 그의 고질이 미웠으나 조국에 대한 거룩한 뜻과 사랑을 지켜온 그를 아니 존경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랑이신 천주님과 그분 안에 약속된 영원한 행복을 거부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만을 고집하는 이 사랑 앞에 쓸쓸했고 슬퍼졌다.
한참 후 나는 인민군 포로들에게 양담배 한 개피씩을 나눠 주었다. 김상위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주는 담배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포로 사병들은 주는 담배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마치 한창이나 하듯이 소리 질렀다.
『프로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담배를 전연코 피우지 않으련다』그때 김상위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조용이 말했다.
『박동무, 노동무, 그 담배를 받으시오. 비록 이 담배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제품이라 해도 이 담배를 주는 손은 우리와 같은 동족의 손이오. 우리가 사랑해야 할 한 형제의 손이오』
『죽음 앞에 변질되어 가는 김상위 동무의 사상이 한스럽습니다. 위대한 인민군 장교로서 또 조국을 통일하고 민족을 해방시키는 이성직(聖職)에 나선 전사로서 어찌 그러한 반동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김상위 동무는 냉정히 자아비판을 해야 할 것이며 동지들의 비판을 엄중히 받아야 합니다. 하여튼 우리는 절대로 이 미제 담배를 피우지 않겠습니다. 한 조국의 겨레며 동족이라는 이 감상적 유혹을 극복하고 위대하신 김일성 동지가 가르쳐 주신 공잔주의 이념이 주는 혁명사상에 배치되고 모순되는 여하한 것과의 타협을 일체 거절합니다』
상처의 고통 속에서 그들은 신음하며 악을 썼다. 김상위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동정 어린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