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도 좋고 주의도 사상도 위대하고 보람있다 하더라도 자기 이상과 주의에 맹목적으로 노예화되어 인간적 감정을 말살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는 한없이 무시했다.
그리고 인간성이 결핍된 사람들의 사상적 독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의 사상적 독선 때문에 인류는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악을 받아왔을까 상상하며 이러한 독선이 바로 이 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상위는 내가 내미는 촛불에 담뱃불을 붙였고 무엇인가 상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담배 한 모금을 힘껏 빨아들이켰다가 벙커 천정에 내뱉으며 다음과 같이 나에게 말했다.
『동무, 지금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주는 환상 속에 이 현실을 잠시 떠나 있었소. 역시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
그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감동적이군요. 동무가 내미는 촛불을 받아들고 순간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소』
『어린 시절에 촛불과 관련된 그 어떤 추억이 있소?』
『있고 말고…부활절 밤미사 생각이 별안간 떠올라 왔소』
『무엇이라고…? 부활절 밤미사…?』
나는 그의 이 말에 아니 놀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피는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며 그를 향해 마주앉았다.
『뭐 그렇게 놀랄 것 없오. 부활절 밤미사 때 촛불을 켜 들고「할렐루야」노래 부르며 미사 참예하던 추억이 새삼 떠올라와 내 마음을 흥분시키고 있소』
『그럼 김상위 동지는 천주교 신자였단 말이요?』
나는 그때 동지라고 불렀다. 같은 천주교 신자란 교우의식(敎友意識)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동정심이 내 감정을 자극시켰다.
『그렇소. 나는 천주교 신자였고 견진성사도 받은 바 있소. 그리고 나는 동무가 천주교 신자임을 알았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소?』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소. 아까 된장차를 마시면서 동무를 무심코 보았을 때 십자성호를 의식적이면서도 거의 기계적으로 놓는 것을 보고 동무가 천주교 신자임은 물론 동무의 신앙 정도를 알아볼 수 있었소. 그리고 동무와 대화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소.』
『김상위 동지는 천주교 신자였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난 지 오래요. 동무가 보는 바와 같이 지금 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국시로 신봉하는 인민군 장교요』
『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소? 그리고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었소?』
『동무 자신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 삶과 이 사회의 허다한 모순 앞에 즉「선」보다는「악」이 득세하는 이 부조리스러운 이 현실 속에 날뛰다 불의와 이에 희생되는 인간적 조건 앞에 천주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악스럽고 불의스럽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온갖 모순과 무질서로 좀먹은 이 세상을 천주가 창조했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런 천주를 믿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나는 교회를 떠나고 말았소. 이와 같이 나는 무신론자가 되었고 인간 삶의 보람과 행복을 현실적인 이 삶에 부여하고 인간 삶을 좀먹는 불의스러운 이 사회제도를 혁신하며 평등과 사랑 안에 인간 삶의 향상을 위해 투쟁하는 공산주의 대열에 참가했소. 그리고 나는 천상적 행복이란 이름 아래 온갖 빈곤과 굴욕과 불의와 희생을 감수하는 종전의 안이하고 노예적인 종교적 인생관을 버리고 고통이라는 인간의 숙명적 조건과 맞서 싸우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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