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차니의 이름을 믿는 동시에 내 추억은 밝아지고 선명하게 그러면서도 급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비춰 주었다.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시간을 거슬러 되살아났으며 명랑했다.
아 조그만 것 짧은 것 이것이 차니가 내게서 숨겨졌던 나의 추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길었고 은밀했다.
왜? 왜 그랬느냐고? 글쎄, 은밀한 것은 순간에 관계없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누가 내게 이 점에 관한 토론을 전개한다면 아마 당장 쓰러지고 말 정도로 내 추억은 하잘것 없는 풀꽃 같은 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특등실에서 기분이 좋았다. 해군사관학교의 생도는 바다에서만은 귀공자가 되어도 몹시 의젓한 귀공자가 되는 신분이다.
함장은 친절했으며 바다는 짙은 잿빛을 출렁이며 겨울답게 장엄해 있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자꾸 우리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대대장도 과연 그랬는지는 자신이 없다. - 전부 유쾌했다면 안 될 말이다. 바다가 우리 신분에 맞게 배경을 깔아 줘서 그랬다는 것도 안 될 말이다.
다만 이런 것들을 거느린 우리의 대화가 우리를 적당한 안식으로 이끌 뿐이었다.
『너무 우습게 생각된다. 네가 몇 개월 동안이나 내 조카 때문에 비척거린 꼴이 말야』
대대장은 먼 항해의 꿈 같은 이야기를 신이 나서 하다가 결국 차니를 나직히 끌어들였다.
그때 벌써 나는 내 자신이 조금도 그녀에게 어색하지 않음을 느꼈었다. 나는 비스듬히 침대에 기대 앉아서 차니를 뎃상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내게 너무 흐렸다. 그 얼굴은 급한 물살처럼 내 뇌리에 덮쳐오는가 하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해서 내 수첩 위에는 타원형과 긴 목과 그리고 하얀칼라에서 머물러 버려서 더진실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조급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천연스럽게도 가장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대대장에게 귀를 갸웃 열고 있었다.
『차닌 착한 애야. 비둘기처럼 포근한 마음을 갖고있지. 그런데 걔는 항상 슬픈 운명 같은 걸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해.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야. 걔 아빠-내 형님이지-는 차니가 아가였을 때 정신이 이상해져서 행방불명 됐어. 의사였는데 무슨 구균반응을 연구하다가 쇼크를 받아서 그랬지. 그때의 차니를 생각하는 건 끔찍한 일이라구. 엄마는 남편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아기에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이 보였지. 내가 얼르느라고 높이 치켜 주면 아, 그 맑은 웃음소리. 눈에 선하다. 정말 비둘기 같았어. 그런데도 그 애에게 엄청난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좀 같이 생각해 줘. 난 그 애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됐어. 그 눈 앞에서 내가 저절로 부끄러워지거든. 그 눈은 지금도 여전해. 아무 것도 없는 눈이야. 걔 아빠가 없어졌다는 그날 치켜 주며 얼르다가 잠깐 의자에 앉혔을 때 그 애는 나를 빤히 보더란 말야. 뭐 보면 볼수록 귀여운 아가 눈이었지. 그러나 나는 다른 걸 봤어. 아무 것도 없는 눈이었어. 텅 비어 있었어. 눈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건 그 자체가 순수 아니겠어?
진우. 너는 이런 경험이 내게 생성해 준 순수가 얼마나 큰지 이해하지 못할 걸. 내가 순수하지 못한데 어떻게 그 눈을 볼 용기가 생겼겠어? 아, 정말 그때 나는 어린 소년이었는데도 그 눈 앞에서는 내 소년이 순수해 보이지 않았어…. 내가 제주도의 큰형님한테로 집을 옮길 때 나는 그 눈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대대장의 눈시울 가득히 옛날이 그늘져 왔다. 나는 내 방황이 대대장이 가진 순수에 의해 어떤 자신을 가지고 분석해 보려고 가만히 깊이를 재어 보았다. 순수하다는 점에서만 오로지 그 점에서만 나는 자를 갖다 대었다.
자기 조카에게서 바다에서 더 짙은 순수를 발견한 그와 바다가 준 무한한 용기를 뛰어넘는 내 지독한 가슴 저미는 하찮은 이야기들, 이런 것들을 비밀로 묶어 나는 보관하기로 작정했었다.『차니 눈은 비었다』라는 것까지도. 창 밖에 눈발이 흩날렸다. 발돋움을 하고 겨울 바다를 보노라니 그야말로 내 얕은 의지와 용기를 모두 수장해 버리고 대신 굉장한 힘으로 떠나는 대대장이 드리운 침묵 속에 묻혀 버린 자신에게 불만했다. 그가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게 나를 쓰라리게 했고 그래서 작은 형님이 행방불명 되자 보따리를 싸고 자기를 맡아 줄 큰형님한테로 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을 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를 화나게 했다. 악이 받쳐오르는 그런 게 아니라 우울하게 심장을 들먹이는.
나는 갑자기 말마디마다 힘을 주어 소리 질렀다.
『형, 그건 차니의 불행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어차피라고?』
그는 PㆍT 소형 보트에 대한 소고가 실린 항해술 전문지를 돌돌 말아 쥐고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조용히 시선을 내 등 뒤에 박았다.
나는 직경이 훨씬 커진 눈송이에 다시 내 생각 전부를 반사시켰다.
남의 처지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차니도 대대장도 서로의 불행에 선을 그을 수 없는 것이라고 겨울 바다에 쌓이는 눈은 나직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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