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의 창설자 베드로 이승훈 선생의 후예들은 지난 29일 선조 이승훈묘의 관리권과 부근 임야 2천5백50평을 서울대교구에 기증했다.
경기도 인천시 남부 장수동 산132번지, 경인국도에서 약 2.5Km 들어간 남향받이 산 중턱에 자리잡은 이승훈 선생의 묘는 이로써 순교 후 후손들의 보살핌이 고작이었던 173년 간의 외로움을 벗고 그가 북경(北京)에서 어깨에 메고 온 성장한 교회의 폭 넓은 보살핌을 받게 된 것이다.
1784년 정초 북경 북당교회를 몸소 찾아가 예수회 그라몽(Louis deGrammorrt) 신부에게 베드로의 본명으로 세례를 받아 그 본명의 뜻대로 한국 가톨릭의「반석(磐石)이 된 이승훈 선생이 많은 책과 성물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이벽 권일신 김범우 등과 서울 명례방(明禮坊) 김범우 집(현 명동대성당 자리)에 모여 한국 교회를 창설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는 1801년 2월 26일(양력 4월 8일) 45세의 나이로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치명한 그의 묘가 이곳에 있음을 1924년「빠리」외방전교회 레웅 삐숑(宋世興) 신부가 발견하기까지 거의 1백 23년간 모른 채 지내 왔었다.
교회사에 관심이 많았던 한국의「빠리외방전교회」신부들이 많은 순교자의 묘를 발견하면서도 이승훈 선생의 묘를 찾지 못한 것은 후손들이 발설을 꺼리고 감추어 온 데도 이유가 있지만 그가 세 번 배교한 것으로 기술한 달레의「한국 교회사」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가 성급히「배교자」로 판정 짓고 관심을 갖지 않은 데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봐야겠다.
후손들은 조상의 위업에 긍지를 지니면서도「배교자」로 백안시하는 교회에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또「천주학쟁이」의 후손에게 미칠지 모르는 위험을 막기 위해 비석도 세우지 않은 채 그저 한 평범한 촌부의 묘처럼 가꾸어 왔다고 훗날 술회했다.
이런 감정은 이승훈 선생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열심한 신자로서 훗날 순교까지 했지만 둘째 아들 국규만은 입교치 않고 그의 가계 중 유일한 미신자 집안으로 남아 있다가 국규의 5대손 병규씨가 작년에야 입교한 사실을 봐도 알 만하다.
지금도 교회 사학자 사이에는 이승훈의 배교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달레의「한국 교회자」의 권위를 너무 믿는 데서 온 경솔한 판단이라는 결론이 우세하다.
교회 사학자 주재용 신부 같은 이는 그의 배교는 전혀 근거 없는 오설(誤說)임을 국내 문헌을 들어 주장하고 있다.
참수 치명이 떨어져 나간 머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일대에선「목 없는 묘」로 불리우는 그의 묘를 교회에 맡긴 것은 이러한 교회의 새로운 인식에 후손들의 감정이 누그러져 지난해 여러 차례의 가족회의 끝에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68년 10월 24일 서울교구 신부들이 세운 높이 2m의 묘비는 한국 가톨릭의 개척자의 묘로선 너무 쓸쓸하기만 하다.
참배자들이 그의 높은 얼을 되새기는 마음에서 나무라도 한 그루씩 심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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