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사시는 6순이 지난 할머니가 딸과 함께 찾아왔었다. 누구 소개를 받았다며 구깃구깃한 쪽지를 내놓으며 괜히 불안해지고 신경 안써도 될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이 쓰여져 사는게 괴롭다고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지난해에는 혈압이 높아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을 못 썼는데 이제는 회복돼서 일상생활에는 하등지장이없다고 했다. 같이 온 딸의 얘기로는 그전 같으면 성격이 대쪽 같고 대가 차서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하셨던 분인데 너무나 달라져 놀랄 정도라고 했다.
4남매를 두셨는데 아들 셋은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있었고 딸도 출가해서 주위에서는「복 많은 노인네」였다. 실제 주위의 노인들은 이 할머니를 부러워해서「걱정할 것이 없는데 왜 불안해하느냐、자식들 따라가 서울서 살지 시골에서 왜 혼자 사느냐?」고 들 했지만 노인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성당에도 열심히 나갔고 새벽미사도 거르지 않았지만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언제나 무엇에 쫓기는 기분이었으며 신자들로부터「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더욱 우울해지고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노인은 주위로부터 소외받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정에서 흔히 보듯이 큰아들에게는 남다른 애정을 가졌었고 큰아들 또한 결혼 전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또 직장에서는 중역으로 큰소리치는 사람이었는데 결혼 후 해가 거듭할수록 부인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게 못마땅했고 몇 차례 고부간에 언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아들은 예전의 아들이 아니었고 어머니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노인인지라 모든 화를 속으로 삭이고 시골집에 살면서 예전에 가정부로 데리고 있다가 딸처럼 키워 결혼까지 시킨、이젠 40이 넘은「수양딸」가족을 문간채에 살게 하고 있었다. 그 집 애들이 등록금이 없어 어려워하자 적잖은 돈을 선뜻 내주기도 했다. 수양딸네와 전화를 연결해서 같이 쓰는데 그쪽 전화가 수시로 와 신경에 거슬리는 데도 차마 싫은 소리를 못하고 지내며 전전긍긍하고 있단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못 이루고 속이 더부룩하고 자주 피로가 와서 동네내과의원에 가면「별 것 아니라」며 며칠분의 약만 처방해주었고 하소연이라도 하게 되면「고독해서 오는 병」이라고만 할뿐이었다. 성당에 가서 기도도 드리지만 자꾸만 분심이 들고、이런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질때도 있었다고 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과 정신의 3가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해도 전체적인 균형이 깨져 병들게 된다. 세 가지 모두가 중요하며 어느 하나만이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최근의 정신신경면역학(PNI)은 정신과 육체는 결코 별개가 아니며 생명현상에서 상호보완체계로 상관관계에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마음의 병이 육체적 고통(병)을 앞선다」는 것은 동양의학의 근본으로 5천 년 전 인도에서부터 전통을 이어왔고 동양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정신건강을 중요시한다. 화-스트레스-가 쌓이면 고혈압 당뇨 위궤양이 생기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배우자가 사망한 뒤 4~5년 사이에 암의 발생율이 높다는 통계와 전술한 정신면역학적 연구를 토대로 화와 암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는 학자들도있다
노인의 고혈압과 중풍은 화가 내적으로 쌓이고 평소 자신의 성격대로 살수 없었던 삶의 부산물이었는지 모른다. 노인의 제일 큰 공포는 주위로부터「배척받고 소외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좋은 소리만 듣고 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하려고 하는 것이 노이로제 환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박정수
<의사ㆍ동화신경과의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