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7일은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하인리히 페스탈로찌 (1746~1827)의 147주년 서거일이다. 이에 본보는 사도 확립이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요청되는 요즘 위대한 세기의 교성 페스탈로찌의 생애와 교육 이념을 통해 불신의 교육 풍토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기대하면서 김정환 씨를 통해 3회에 걸쳐 그의 사상 및 인생관을 알아보기로 한다. <편집자註>
2월 17일은 교성이라고 일컬어지는 페스탈로찌의 서거일이다. 유교에서는 서거일을 기일 즉<꺼려야 할 날>로 여기며 불교에서는 이것을 입멸일 즉「생사를 초월해서 도에 들어간 날」로 여긴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는 이날을 하느님이 맡기신 일을 다 하고 하늘나라에 개선한 날로 기리면서 기도 속에 되풀이 되풀이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날이 유교나 불교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서 위령을 하는 날인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더욱 산 우리가 마음을 새로이 다지며 우리의 삶의 자세를 새로이 가다듬는 날이라는 바로 이 점이다.
(※가톨릭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음으로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한다.) 철학하면 플라톤을, 교육하면 페스탈로찌를 연상하게끔 우리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온 페스탈로찌를 새삼 우리가 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페스탈로찌는 1746년에 스위스의「츄리히」에서 태어나서 1827년 서거했다. 그러니 그분이 선한 싸움을 다하고 가신 지 꼭 147년이 되는 것이다. 그와 우리와의 사이에는 이렇게 큰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이렇게 추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사랑과 믿음과 교육적 생애의 기본 자세를 다시 음미하고 그런 자세를 우리가 오늘날 우리 한국의 교육의 마당에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다.
페스탈로찌처럼 사명감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소명감에 투철하며 또 이에 충실한 교육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의 使命은 무엇이었던가? 교육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일찌기 교육은 상류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대새을 위한 것으로 돌려 놓았다. 일찌기 교육은 미리 틀을 짜놓고 어린이를 이 틀에 밀어넣으며 매질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전환시켜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은혜롭게 주신 소질을 계발 발전시키는 일로 정립하였다. 일찌기 교육은 부스러기 지식을 머리 속에 주입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것을「지덕체」의 조화적 발전으로 전환시켰다. 일찌기 교육은 능력 있는 자 재산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졌다. 그는 이것을 모자라는 자 없는 자에게로 전환시켰다. 일찌기 교육은 학교에서만 행해지는 일이었다. 그는 이것을 가정 학교 교회 사회를 하나의 교육의 마당으로 포섭하는 국민교육으로 전환시켰다. 일찌기 교육은 매를 가지고 다스리는 교사에 의해서 행해지는 일이었다. 그는 이것을 어린이의 자주적 탐구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일찍이 교육은 기독교「교리문답」을 암기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눈에 보이는 이웃에게 빵을 나누어 먹는 일로 전환시켰다. 이이상 들어 무엇하리오 참으로 그에의하여 교육이 대전환을 일으켜 오늘날 우리가 이상으로 받들고 있는 현대교육의 여러 이념의 터전이 굳혀진 것이다. 그리고 이 터전 위에 근대의 국민교육의 전당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져놓은 이런 이념이 그의 머리 속에서 솟아나온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러한 귀한 이념들은 피가 끓고 살이 뛰며 괴로움에 울부짖기도 한 그의 사랑과 실천 및 학문적 탐구의 생애에서 체험으로 고백된 것들이다.
우리는 페스탈로찌를 거지나 업어 키우고, 교정의 유리나 줍고 다닌「사랑의 교사」로 얄팍하게 그리고 쎈치하게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은 큰 오해다. 그에게는 확고한 논리, 인생관, 세계관에 비롯한 교육 철학이 있었다. 그의 20권에 육박하는 교육적 저작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첫째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자각이요, 둘째는 인류의 공동운명체적인 자각이요, 셋째는 인류를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고 있는 그릇된 체제를 교육을 통해서 개혁해야 한다. 아니 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과 그 해결 방안의 성실한 모색 위에 선 교육의 막중한 의의와 가능성의 자각이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인구문제, 공해문제, 빈곤문제 인간의 기능화, 기계화 문제 인간의 상품화 현상문제, 가치 감각 상실문제, 전쟁문제, 편견문제 그리고 무종교화 문제 등이 이것이며 필자는 이것을 인류의 십대문제라 생각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정말 우리가 풀지 못할진대 자폭을 초래하는 시념한 과제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 학생들은 어떠한가? 불조리현상에 지친 나머지「삼무주의」에 빠져 있다. 무관심ㆍ무감동ㆍ무책임이 그것이다. 나와 우선 직접 관련이 없는 일에 관심은 가져 무엇하며, 이것도 저것도 다 거짓인데 감동은 무슨 바보스러운 짓이며, 어차피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책임은 무엇 때문에 느끼는가! 그들의 내면생활은 이렇게 황량하며 이렇게 무디어져 가고 있다. 우리가 못다 푸는 짐을 넘겨 주고자 하는 바로 그들이!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페스탈로찌의 사랑 믿음 교육의 기본적 이념을 이어받고 그의 자각을 우리의 자각으로 굳힐 때 인류의 과제는 풀리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찌 연구가이자 독일의 뛰어난 철학자인 쉬프랑거는 휴매니즘=기독교=복지사회의 새 체제로서만 인류의 구원은 가능하다 했다. 깊이 음미해야 할 생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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