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족(三族)을 멸하고 선참후계(先참後啓)를 해도 좋고 한 사람이「천주학쟁이」20명 이상을 고발하거나 목 베면 상을 내리겠다는 대원군의 불호령이 8도를 휘몰아치던 1866년 병인박해는 충청남도 바닷가 해미(海美)지방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때 해미읍에서 약1ㆍ5km 떨어진 곳에 큰 웅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무더기로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봐도 이 지방 교난의 참성을 짐작케 한다.
1956년 3월 필자는 서산본당 신자 피정차 갔던 길에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1935년 가을 당시 서산본당 주임이던 바로 범 신부가 목격자들의 고증을 토대로 시체를 발굴 서산 천주교회 묘지에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때 고상 상패 묵주 등 많은 유품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필자가 찾은 순교 현장은 논밭으로 변해 옛 모습을 찾을 길 없었지만 혹시나 해서 해미읍 안팎을 쏘다니다 우현히 그곳 유지인 해미국민학교 교장 안명선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얘기가 오가던 중 교장 사택이 서문(西門) 근처에 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대원군 시절의 15평짜리 감옥 터라는 것이며 안 교장의 말이 그 집에선 밤마다 귀신이 나와 구슬프게 울어대는 통에 살 수가 없어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짓고 이사해 산다는 것이다.
그런면서 그는 서문 밖 형장터에 그때「천주학쟁이」들을 태질해 죽인 큰 바위가 그대로 있는데 가보겠느냐고 한다.
늙은 말 콩 마다할 리가 없듯 그 길로 달려가 안 교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길이가 13척(尺) 넓이가 5척 두께가 1척이나 되는 큰 돌이 또랑에 걸쳐 있는데「달레」의「朝鮮敎會史」에『천주교 신자들을 태질해 죽인 바위를』임을 알 수 있었다.
안 교장은 당시이 근처는 그렇게 죽인 신자들의 핏자욱이 낭자해 사람들이 피해 다녔다는 선친의 말씀을 듣고 이들을 늘 기억에 담아왔던 것이다.
그해 6월 14일 서산본당 주임 신 도민고(윤식) 신부와 상의, 이들을 서산본당 정문에 옮겨 세웠는데 40명 인부가 GMC 트럭에 싣는 데만 8시간이 걸렸다.
보기에 평범한 이들 위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들이 신앙의 꽃을 피우고 가기에 안간힘을 다했던가.
가끔 서산을 찾을 때마다 웃깃을 매만지며 묵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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