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역시 나는 차니를 두려워하게도 했다.
걔가 자기의 불행을 모조리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자꾸 가슴으로 끌어당기는 그런 점이 나를 더 깊은 불안으로 몰아넣었어.
생각해 봐. 걔 엄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버리면 걔는 혼자 남게 된다. 그걸 알면서도 그 속으로 기분 좋게 흡수되는 그 의지는 내게 두려움을 주고도 남았어.
아, 얼마 후 정말 걔는 송두리째 불행해 버린 것처럼 보였었지.
내게 언제부턴가 여자 친구가 생겼지. 내 마음은 예전처럼 그애와 같이 느끼지 못하게 되었었어.
나를 보면 그렇게 좋아하던 차니가 자기와 같이 내가 느껴 줄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무척 슬피했지.
물론 나는 내 여자 친구가 좋았어.
그래서 차니와 같이 느끼지 못하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었어.
어느새 차니는 혼자 느끼기 시작했지.
『삼촌도 그렇게 느끼고 있지?』
하는 질문을 다신 안 하게 돼 버렸어.
그러나 걔는 빛나고 있었어.
어떤 에네르기의 원천이 그에게 있었던 거야, 나는 그다지 그애가 아무 변동 없이 잘 지내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어. 무조건 나는 그애에게서 멀어져 갔던 거야.
내가 걔에게 무관심한 도가 지나칠수록 그애는 내게 보이던 슬픈 눈매도 몹시 안온해지고 뭐랄까, 평화를 지닌 사람처럼 온화하게 나를 맞아 주곤 했지.
내가 자기와 느껴 주지 못하는 것에 조금도 애석한 빛을 보이지 않고 말야.
차니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그러니까 재작년 크리스마스였지.
우리는 같이 가정미사를 드리러 성당엘 갔어.
나는 큰 맘 먹고 내 여자 친구와의 모든 약속을 백지로 돌려 버리고 차니와 동행했던 거야.
그렇구나.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차니 엄마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어.
덕분에 내 형님도 차니도 영세를 받았어.
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지만 모두 조용하더군.
그때는 눈이 참 많이 왔었지. 성당들 한구석에 있는 성모 동굴 앞에도 참으로 화려했었어.
촛불은 굵고 작고 또 색이 틀리고 모양이 갖가지였는데도 모두 같은 모양으로 타오르는 게 신비했어.
차니도 정성스럽게 꾸려 온 초를 바치기 위해서 성모상 앞으로 가까이 걸어 나가더군.
차니의 초는 거기에 있는 어느 초보다도 작고 보잘것 없었어.
그런데도 차니의 모습은 정말 그 초 때문에 그렇게 황홀해 보였어.
그래. 차니는 그런 애야.
걔는 초를 촛대에 끼우고 나오다가 성모상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동굴을 기어오르는거야.
진우. 너도 본 적이 있겠지만 그런 동굴은 높거나 가파르지 않아.
그러나 저 애가 왜 저럴까? 하는 궁금중은 오래 가지 않았어. 드디어 성모상이 있는 데까지 닿자 차니는 발돋움을 하고 성모상과 키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차니의 키는 너무 작았어.
아무리 애써도 차니의 머리는 성모상의 가슴까지밖에 닿질 않았으니까.
나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지.
다행히 그곳에 사람들이 없어서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됐었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니까 내려오더군.
그리고는 장궤틀에 무릎을 끓고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어.
나는 그애의 행동을 낱낱이 보는 사이에 마음이 이상해져 있었어.
너무 조그맣고 가련한 조카에 대해서 냉혹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거야.
나는 마음으로 빌었어.
무엇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군. 그러나 나는 뭔가를 얻기 위해 기도한 것만은 분명해.
마음이 밝아왔어.
나는 잠시 동안이지만 내 여자 친구 때문에 잃어버렸던 내 마음의 차니에 관해서 어느새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내 소중한 마음을 찾았지. 드디어.
아. 그렇지. 내가 그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껴졌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진실한 말일 것 같다.
『미안해. 삼촌』
차니는 한참 후 가정미사가 시작되는 종소리가 눈 사이를 헤치고 우리 곁에까지 내려앉았을 때 내게 고개를 돌리고 미소하며 말했어.
『뭐가?』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되물었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는 목에 늘 걸고 있던 메달을 꺼내서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키스하는 거야.
걔는 그 메달을 한 번도 맨 적이 없었을 거야.
순금으로 된 성모상이 새겨진 조그만 목걸이었어.
형님께서 그애의 첫돌 때 만들어 준 거지. 걔에겐 아빠가 남겨준 유일한 재신이고….
『저분은 항상 나와 함께 계셔 주신다는 걸 나는 믿어. 정말 조금 전에는 미안했어』 그애는 갑자기 이쁜 것 같았어. 아마 그애와 같이 느껴 주던 이가 바로 그 세기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그 여인이 마음을 열어 줬다고 내가 생각한 건 지나친 신심일까? 내가 말했지.
『차니야. 삼촌도 한 번만…』
『삼촌은 이제 나와 같이 느낄 수 없잖아』
『아니야. 아까 성모님께서 삼촌이 차니와 느낄 수 있게 내 마음을 열어 줬어』
『나도』
나는 메달에 내 이마를 갖다대었지. 난 그 후부터 내 여자 친구를 멀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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