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탈로찌는 병약했다. 그런데 팔십이년이란 장수를 누린 비결은 어디 있었는가. 자신의 사명의 완수를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몰두한 데 있다.
정말 몸조심하고 걱정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도리어 건강을 유지하는 첩경이라는 것을 그이 생애를 훑어 봄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큰 교훈의 하나이다.
그는 목사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가난한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법률을 공부하게 된다. 그 무렵 그는 급진적인 학생운동의 리더의 하나가 되어 법적 문책을 받고, 법률 서적을 태워 버리고 농촌에 들어가 자영하며 농민의 자활의 길을 찾고자 했다. 농업에 실패하자「노이호프」라는 자기 농장에 빈민 노동학원을 차려 고아 및 빈민의 자녀들에게 주경야독시키기도 했고 한편 그 자리에 방직공장을 병설하여 요새말로「알바이트」도 시켰다. 이에 실패한 다음 그는 농민을 위한 계몽소설을 썼는데 당시의 베스트 셀러가 되어 이 소설은 유럽의 식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그는 신문사 편집장 고아원장을 거쳐 드디어는 유럽의 교육의 메카가 된 학원의 창설자이자 교장이자 이사장이 된다.
그가 새로운 이념에 의하여 경영되는 현대적 학교의 원형인 실험학교의 원장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에도 그의 가슴속 깊게 늘 새로와지는 소원은 빈민 및 고아들을 위한 자활교육 시설의 경영이었다. 그가 학원을 해산하고 80살의 나이로 고영초연하게 옛 꿈터「노이호프」에 돌아갈 때에도 거지들을 몇 대동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다시 실현 못하고 2년 후에 서거했다.
페스탈로찌의 교육 철학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계승되었다. 그러나 고아를 위한 교육, 빈민을 위한 교육 그리고 노동하면서 배우며 자활의 터를 닦아 주는 교육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이런 측면의 그의 활동을 계승한 사업 또는 학원이 몇 있다. 다음에 그것을 소개하면서 한국적 과제를 생각하여 보자.
첫째 페스탈로찌 교육(Pestalojjiheim)이다.
이것은 그가 서경야독시키며 빈민의 자녀의 자활을 위한 교육을 모색하던「노이호프」에 있는 교육촌이다. 이것은 광활한 대지에다 원운농장ㆍ제화공장ㆍ재단공장ㆍ목공소ㆍ기계공장을 차려 스위스 각 현 및 유지들의 지원 아래 스위스 청년들의 기술교육의 센타가 되어 있다.
둘째 페스탈로찌 아동촌(Kinderdorf Pestalojji)이다. 이것은 제2차 대전 이후 설립된 국제 고아원이며 처음에는 주로 유럽의 고아들을 데려다가 양육하고 교육하는 시설이었는데 유럽의 패전국들이 부흥하자 차츰 동양의 고아들에 관심을 쏟아 티베트ㆍ한국ㆍ인도ㆍ월남의 차례로 고아들을 수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아동촌은 고아들의 국적에 따라 별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한국관인<아리랑집>에는 현재 이학표ㆍ유기섭 부부 교사 밑에 15명의 한국 고아들이 고이 자라고 있으며 그 중에서 우수한 아이들은 대학에도 진학하고 있고, 또 고국 방문의 기회까지 부여 받고 있다. 이들은 곧 한국에 돌아와 페스탈로찌 이념에 입각한 구제ㆍ교육사업을 벌릴 것으로 기대된다.
셋째 일본 동경교외에 자리잡은 옥천학원이다. 이 학원은 페스탈로찌 학자인 소원국방에 의하여 경영되는 유치원ㆍ소학교ㆍ중학교ㆍ고등학교ㆍ대학교ㆍ대학원을 다 포용하는 전인교육ㆍ생활교육ㆍ작업교육ㆍ자영교육ㆍ전료교육(전학생을 기숙사에 수용하여 인격교육ㆍ전일교육을 시킴)의 마당이다. 그리하여 학교이자 공장이자 가정이자 사회인 이상적인 교육촌을 이루어 세계의 교육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고.
이렇게 페스탈로찌의 이념에 입각한 사업 및 학원들이 연이어 발전하고 있다. 우리 한국도 이런 사업을 시작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교육을 통한 인류의 구원과 교육입국의 길에 뒤지지 않게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의 페스탈로찌의 교육 이념을 보다 깊이 연구하여 교육의 마당에 반영하는 일이요, 둘째는 종합기술교육센타를 모범적으로 농촌에 하나 건설하는 일이요, 옥천학원과 같은 규모가 큰 전인교육의 학원을 하나 모범적으로 경영해 보는 일이다.
페스탈로찌라는 하나의 인격의 힘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미치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위대한 인격의 뒤에 하느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찌 자신도 늘 내가 벌리고 있는 사업은 나의 사업이 아니고 하느님이 시키시는 사업이라고 다짐하며 괴로울 때마다 자세를 새로히 가다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도 오산학교를 창설, 경영하시면서 그렇게 느끼셨고, 임종 직전에『내가 민족이나 사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백성된 도리에서고 특별한 일을 한 것이 못 된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하여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하시면서 하느님을 찬송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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