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호군(胡軍) 3만이 조선을 들이치자 허트러진 조국을 최명길의 주장에 따라 그해 3월 3일 양국 간에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수습하였는데 이때 쌍방이 합의점에 도달한 조항은 다섯 가지로 ①평산(平山)에서 일 보도 넘어서지 않는다(서울 방면으로) ②화맹(和盟)이 결정되는 다음날부터 곧 호군을 철수한다 ③철병 후는 다시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는다 ④두 나라는 서로 형제국으로 지낸다(조선이 동생이고 청국이 형으로 행세한다는 뜻) ⑤조선은 금(金나라)과 강화하여도 明나라에 배반하지 않을 것 등이 바로 정묘란(丁卯亂)의 강화조약 내용이다.
정묘란을 치룬 지 10년째 되는 해(1636년ㆍ인조 14년)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는 것보다는 군신의 도(君臣之道)를 맺자는 청국의 요구를 조선 정부가 거절하자 청은 1636년 12월 2일 만주ㆍ몽고ㆍ한인(漢人)으로 구성된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왔다. 이조는 우선 비빈과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왕자 신은 세자 소현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어전에 지친 왕은 1637년 1월 23일에 송파삼전도(松坡三田渡)에 내려와 청 태종에게「군신의 도」를 맹세하면서 항복하였다.
이때 청 태종(淸太宗)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청국 수도 심양(심陽=지금 奉天)으로 끌고 갔다.
그 후 1644년 9월 19일 청나라가 봉천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자 소현세자도 북경으로 들어가 90일간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아담ㆍ샬(湯若望) 신부를 이웃에서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는 한편 서학(西學)과 서양 신문화와 과학 특히 천문학을 연구하고 천세력을 배웠다.
그 후 1645년 2월 18일에야 한양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그때 탕요한 신부에게서 선물로 성폐ㆍ성경ㆍ성서ㆍ예수 상본ㆍ묵주들을 받아 가지고 왔는데 조국에 들어가서 세자 몸소 한문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조야(朝野)에 진리를 펴겠으니 신부님도 동반케 해 달라고 청했으나 그때 사정이 신부가 입국하기 어려운 때라 탕요한 신부는 대신 열심한 천주교 신자 환관(환官) 5명과 궁녀 2ㆍ3명을 딸려 보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70일 만에 돌아가시니 환관과 궁녀들은 그해 7월 22일에 사신들이 옹위하는 가운데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즉 1645년 2월 22일부터 7월 22일까지 5개월 동안 천주님께 드리는 기도 소리가 창경원 대궐 뜨락에 은은하였으니 이것이 329년 전 일이었다.
필자는 1963년부터 이 소현세자 묘소를 찾아 헤매다가 6년 만인 1969년 10월 17일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서삼릉(西三陵)서 북쪽에 처량하게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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