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큰형님께서 올라오셨어.
차니에게 제주도로 가서 같이 살자고 했지.
차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을이 되면 내려간다고 했어.
큰 형님네는 자식이 없으니까 잘 봐주실 거 뻔하지. 그러나 나는 생각해 봤어. 차니가 형님 댁에서 잘 커나갈 수 없을까 하는 문제를 말야.
그러나 차니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에 찬 눈초리였어.
형수님만 친자식처럼 귀하게 여겨 준다면 문제는 없지. 그런데 형수님은 다정다감한 분은 못 돼.
제주도 여자들의 특성이랄까. 거세면서도 근면한 반면에 오죽 무뚝뚝해?
차니 엄마는 그와는 정반대였지.
몹시 섬세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어.
갑자기 분위기 전부와 생활방식이 변했을 때 그걸 그 애가 잘 이길 수 있을지.
사실 나도 서울에서 제주도 형님께로 옮겼을 때 형수님의 성격에 부딪쳐서 많이 울었었지. 뭐 지금은 괜찮지만.
만일을 생각해서 서울집은 부엌 아줌마에게 맡기기도 했지.
하숙이라도 하면 혼자서 알뜰하게 집을 돌보며 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처음에는 집을 팔아 버리자고 했지만 내가 우겼어.
차니는 가만히 있었지. 그러나 형님네한테서 살기가 겨웠을 때 차니는 자기집으로 와야지. 더구나 제주도는 걔에겐 낯선 곳이었어.
아빠의 고향이라는 말뿐이지 한 번도 자기 눈으로 본 적도 없는데 쉽게 적응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잖아?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면 진학문제도 있는 거고….
내가 한참 떠들다가 차니를 봤더니 자기 아빠가 행방불명 되던 날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 눈 앞에서는 항상 부끄럽게 내 자신이 여겨지지.
그 눈은 비어 있었어.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
『…정말 아무 것도 죽는 것까지도 아깝지 않는 거야』라고.
아, 그렇구먼 하고 나는 다시 느꼈지.
차니는 거역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결코 모든 추억을 안고 있는 곳에만 애착하려고 하지 않았어.
자기 아빠와 엄마의 죽음을 어떤 숭고한 것에의 승화로 여기고 있었던 만큼 걔는 자유스럽게 모든 행동을 사랑한다는 것에 줘 버리는 거야.
걔는 결코 명랑한 애는 아냐.
그러나 그 애처럼 평온한 애도 없을 거야.
걔는 역시 고아야.
고아는 늘 외로움을 느끼지.
그리고 더욱 더 같이 느껴 줄 사람을 찾게 돼.
물론 걔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 적은 없어.
그러나 이따금씩 이런 질문을 하곤 했지.
『삼촌도 고아라고 할 수 있어?』
『그럼 나도 차니처럼 고아야. 나도 아빠 엄마가 안 계시잖아』
『그래도 삼촌에겐 형제가 있잖아?』
『마찬가지야. 나는 차니와 같이 되는 게 참 좋아』
난 사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걸 늘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차니처럼 아무도 안 계셔 준다는 데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난 거야.
즉 내 부모님도 잘 날을 수 있는 날개를 갖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진우
지루했지?
그렇게 해서 작년 겨울에 너는 내 조카를 제주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거야.
벌써 바다는 어두워져 있었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나는 대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어떤 세계를 경험한 기분이었다.
즉 열대림 속이 신비스런 여러 가지 곤충들 독뱀들 어떤 살아 있는 생명체보다도 우크라이나 지방의 단단한 삼림을 뚫고 여명을 내쏘이는 직광보다도 한 인간에게 주어진 교모한 삶과 그것을 콘트롤하는 제삼의 힘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고상한 것, 대대장도 차니도 그리고 어쩜 나까지도 한 몫으로 그 나라의 행복한 인간들이 아닐까?
눈은 어둠을 가르며 자기의 몸맵시를 내보였다.
내 시야가 닿는 한계 안에서 시원스럽게 나풀대며 겨울바다를 향해 투신했다. 나는 어린 소년처럼 배가 조금씩 움직이는 걸 눈을 바라보며 즐겼다.
움직인다고 하는 의식 속에서만 내가 앞으로 경험할 신비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애써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눈발을 음미함으로써 전진의 멋을 살렸던 것이다.
역시 멋진 밤이었다.
침대에 기어들 때의 기분은 밤새도록 달콤한 꿈 속에 젖어서 행복한 자신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한편 씁스레한 입맛을 느껴야 했다.
대대장의 이야기에서 내 애정관 같은 것이 한껏 유치하게 마음의 저변을 저미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언제 나와처럼 눈이 쌓여서 장엄하게 자태를 바다에 드리운 한라산은 멋진 산임이 틀림없었다.
당당하게 보여질지라도 결코 자랑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게 하는 겸손한 모습이었다.』
새벽 포구에 그늘 지워진 한라산은 배가 앞을 가르며 조용히 움직일 때 같이 흔들려서 파장 속에 말려 버렸었다.
배가 서서히 옆구리를 선창에 드리댈 때 나는 드디어 고향에 돌아온 뿌듯함에 겨워 기지개를 켰다.
하얀 입김이 흰 날개를 펼치고 끼룩대는 갈매기와 어울려 시야를 약간 흐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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