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영원의 상하」에서만 보지 말고 인간을 움직이고 발전하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향에서「복음화」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더욱 뚜렷해진다. 우주와 인간과 세계를 정적인 상태에서 그 영원한 본질을 분석함으로써 초자연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형이상학보다는 우주와 인간의 세계를 진화하고 발전하여 그 최후의 목적에 도착하려는 모습으로 종합하는 근대의 자연과학적인 우주관 또는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초자연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훨씬 참신한 형이상학이 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갈릴레오에 의해서 지동설의 우주관이 확정되고 다아윈 이래로 생물의 진화론이 확실하게 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한히 확대된 시간과 공간의 대해 속에 파묻히는 듯한 깊은 상처를 감추기 어려웠던 인류 구제의 신앙을 도리어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인류의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복음을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지평선 위에서 발견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사상이다.
떼이야르 신부는 인간을 이미「존재하는」것으로 보기보다는 신을 향해서「존재되어 가는」것으로 본다. 인간은 신에게 도달할 존재라고 한다.
인간의 목표는 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는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지구의 과거를 탐색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떼이야르의 이러한 비전은 참으로 명백하고 대담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행진한다. 인간의 마음뿐 아니라 그 노동도 산업도, 그리고 인간뿐 아니라 생물도 무생물도 그리스도를 향해서 그리스도화해 가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화라는 것은 곧 이러한 그리스도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인간은 돌연히 지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만물을 모체로 삼고 출생한 것이다. 인간의 모체는 우주이다. 그리고 그 우주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모체가 되는 일이라고 하겠다.
생명이 진화한다는 것은 뜻이 없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필연의 법칙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목표가 있어서였다. 그 목표는 인간의 출현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만물 중에 하나의 우수한 생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만물의 존재 이유이며 만물에게 뜻을 부여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이 진화하는 이유라는 뜻에서 인간은 만물의 진화의 선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우주 진화의 목표이며 그 비밀은 이해시키는 핵심이기도 하다. 인간은 우주를 모체로 태어난 우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을 그 환경에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우주의 품 안을 떠나면 영양을 섭취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
그런데 교회의 가르침은 대체로 현세를 경시하는 폐단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현세뿐 아니라 내세가 있다. 즉 수원한 생명이 있어서 현세의 모든 행복과 모든 고난을 다 받는다 해도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완전하고 절대적이라는 신앙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지상의 생명이 눈물의 골짜기보다도 더욱 비참하게 보이고 무상한 것이고 보잘것 없는 부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을 완성하는 길을 되도록 현세적인 것을 초탈하고 천상의 것에만 몰두하는 생활 감도에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교훈이 전통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향해서 발전하는 우주의 아들이고 보면 우주의 바탕 없이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아무리 아침 저녁으로『지상의 것을 경멸하고 천상의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하는 기도를 수없이 반복해도 헛된 일이고 극히 소수의 영웅적인 성인들만이 마치 육신을 안 가진 것 같이 천상에만 봉사하여 인류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교훈을 포기하거나 이중생활을 하게 된다. 신자는 두 개의 세계에 속한 생활을 한다. 일상적인 세속사회와 교회라는 세계를 따로따로 살아간다. 사회와 나가면 생존 경쟁을 위해서 투쟁하고 출세하고 권력을 장악하며 장래를 위해서 계획하고 조직하고 선전한다. 이에 반해서 교회의 뜰 안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부에게 머리를 숙이고 반성하고 감상적이 되고 거기에서는 사용하는 언어가 따로 있고 대개는 2천 년 전의 지중해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계절에 따라서 화제에 오른다. 신부의 설교는 대체로 일상생활과는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주일이면 교회에 간다.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서 그리스도를 보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모양이다. 그 그리스도는 때로는 구유 위에 때로는 십자가를 지고 또 때로는 부활의 영광 속에 구름을 타고 오시기도 하고 가시기도 하는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나타난다. 이「신화」도 버릴 수 없는 것이고 저「현실」도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대체 어떻게 연결된단 말인가? 한편은 가짜고 한편은 진짜인가? 양심적인 신자는 이 문제를 깊이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위선 또는 독선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편을 포기하고 만다. 그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으로 갈라놓고 그 중에서 인간적인 것을 택하게 될 것이다.「복음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신앙인을 이러한 이중생활에서 우선 탈피시키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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