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가 아직도 성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면 현세는 어둠이 지배한다. 어둠과의 거룩한 대결을 통하여 비로소 마음에 빛을 던진다는 전제 아래 인류 구제와 인간 회복의 세기적인 과제를 염두에 둔 문학 예술인은 늘 맑은 눈과 불타는 심장을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의 자세는 성직의 차원과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司牧」誌 3월호가 교회의 지성과 교양을 향상하고자 문학 특집에 모든 지면을 할애한 편집 의도는 요컨대 한국의 현실적 요청을 정당하게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고 해서 권두시를 비롯한 6편의 시와 5편의 소설 12편에 달하는 평론 및 수상류 모두가 역작이라거나 주옥편일 근거는 물론 희박하다. 성십자가 주변을 맴도는 복음의 문운적 투영이 고작 상식적인 사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시한 권선의 도구로 언어가 동원되고 있음에 비추어 또 한 번 불모지의 문학 풍토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병폐는 가톨릭계의 문학이 전담한 성질의 것만은 아니다. 성 십자가의 한국적 신학 체계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한 교회 전반의 정신 언어 부재 현상의 일환이 아닌지 모른다. 어찌하여 고투의 흔적도 없이 은총을 바라며 부활의 영광만 누리고자 하는가. 어찌하여 심장의 언어로써 사물과 격투하려 들지 않고 성구의 안일한 배합으로 혼자만의 구원을 넘보는가.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사랑으로 예술활동을 해야 한다고 지당한 주장은 하지만 말만으로 신앙이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실천 없는 입장의 과시만으로 예술이 완성될 리는 없다. 성 십자가 문예 양식의 현대적 개화가 우리에게 좀처럼 손쉽지 않은 근본 이유는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 체험과 투철한 정신 모험의 미급에 있는 줄 안다. 고통의 현장을 떠나서 신비의 영토가 저절로 개척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차피 성 금요일의 사도로서 우리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司牧」誌 특집『문학과 신앙』의 논조와 작풍은 그러한 다짐의 자료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직도 늦지는 않다. 새로이 시작하는 슬기가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된다
그러자면「메마름의 찬미」「어두움의 찬미」「믿음의 찬미」를 되새기며「골고타의 길」(최민순「아버지 뜻이라면」)로 돌진해야 하는 것이고 영혼의 냉기를 가시게 할「불씨 한 덩어리」(임성숙「갈망」)로써「약간은 후즐그레한 소시민/지극히 평범한 나의 신」(허영자「나의 신」)의 애상조를 극복해야 할 일이다.
한편 다른 시편들「은총의 나무 네 그루」(박성룡)는 너무도 단순한 동화적 혜상에 그치고 있으며「어느 산책」(김윤성)과「누군가 이 겨울」(홍윤숙)의 경우 시적 형상화는 세련되어 있지만 미지근한 심리표출에 그친 편이다.
단편소설「채국기」(장룡학)와「낡은 수첩」(김의정)에서 인간성 회복의 시도인 점에 일단 관심을 끌게는 하나 그것이 날로 혼미해져 가는 이 땅의 사회적 양심에 조명탄의 구실을 하기에는 소설 전개가 너무도 작의적이어서 부자연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애착이 가는 주제이면서 작품의 밀도와 중량이 어 느한계점에 멈춘 것을 안타까와 한다.
평론으로 현세기의 위대한 종교 시인 T. S. 엘리어트와 P. 끌로멜을 성찬경ㆍ남궁연 두 교수가 각각 소개하고 있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어 주지만 한국 가톨릭 문학의 전개에 정지용의 위치를 논급한 김윤식ㆍ구중서 양씨의 서로 충돌되는 견해의 제기는 극심한 혼전을 빚고 있다.
사춘기에 연애 대신 시작을 한 정지용은「친일도 배일도 못한」「비정치성 운술파」(정지용「산문」86면「조선시의 반성」에서)로서 정상에 오른다.
1930년대 그 가혹한 상황에서 가톨릭적 뮤즈의 사제인 양 그는 묵상에 잠긴다. 문화의 역사적 무풍지대에서 잠자던 그가「생활을 유실하고 투쟁 앞에 전율」(散文」24면)하면서 시를 버리고 교회의 품을 떠나기는 8ㆍ15 이후의 일이다. 결국 그의 가톨릭은 모더니즘의 한 방편임이 확실해진다. 그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함몰되는 비극은 소박한 획일 구조의 파산에 다름 없다.
진정한 영적 체험도 없이 멋스런 형식주의자는 더 이상「지상의 정신비애를 시의 열락」(정지용「문예독본」206면「詩의 옹호」에서)으로 삼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사고체제는 지극히 빈약해서 예컨대「에스프리 운동」을 전개하는 E. 무니에의 인격주의에도 미치지 못한다. 변증법적 지성이 미비한 정지용을 두고 그의 시에 아낌 없는 찬사를 던지는 안목도 즉흥적이지만 뒤늦게나마「시적자유」(「산문」80면)의 분위기 확보에 고심하는 자세 자체까지 과소평가하려는 입장 또한 그릇된 사관의 폭력에 편승함이 아닐까 정지용의 파산은 얼치기 가톨릭의 종말이라기보다 상황과 문화의 쓰라린 단절의 결과다. 그에게서 문학의 무슨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일종의 낭만적 발상으로 여겨진다. 차라리 근원적인 악에 대한 애착에서 일체의 순응주의를 거부하고 혁명적 기독교전통을 새로이 수립한 G. 베드나노스의 은총의 승리가 우리에게는 새삼 아쉽기만 하다. 그가 철저하게도 전투적인 정신생활을 통하여 인간 영혼의 신비경을 작품에 담고 처녀작을 발표한 것은 38세 때가 아닌가. 그렇다. 아직 늦지는 않다. 가톨릭 문학의 한국적 의미 구명과 함께 새로이 출발하는 용단성이 다시금 요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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