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인간계발이라는 것은 인간을 새로운 단계로 전진시키는 일이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 회복이라고 할 때와 같이 다만 인간을 본래에 있던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실낙원」에서 「부낙원」하는 것이 인류의 이상이라면 인간의 목표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간관념은 복음성서적이기보다는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주기적으로 원운동처럼 되풀이하는 역사관이다. 피타고라스적인 운명론이나 그 밖에 여러 그리스신화와 전설에서 나타나 있다. 플라톤철학의 인식론 즉 진리의 회상설 같은 것도 과거로 복귀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모든 그 후의 휴매니즘은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인건 반그리스교적이건 간에 인간이라는것을모든 억압이나 장애에서 해방하여 본연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문화라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원죄의 흔적을 하나씩 제거하는 일이다』라는 생각도 같은 뜻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역사관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역사를 전진시키고 창조하기보다는 역사로부터 후퇴하여 완전한 고향을 찾는 나그네처럼 길을 가는 것이 역사의 뜻인 것 같이 보일 것이다. 가급적으로 원점에 속히 회귀하기 위해서는 역사상에 새로 생겨나는 모든 것을 되도록 멀리하고 이탈하고 도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역사관의 뜻을 오해하기 쉬운 상태에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인간의 역사적인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그들은 천주의 나라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노력의 가치가 거기에 무슨 역할을 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전통적으로『기구하고 일하라』라는 교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구는 천상에 봉사하는 귀중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노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가 없고 다만 육신을 유지하고 또 고신극기하는 뜻으로 했던 것이다. 인간이 하는 노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천주는 창조를 완료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인간과 더불어 우주 창조의 사업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뜻이 된다.『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천주께서 너 없이 너를 구원하지 못하신다』(성 아우구스띠노)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천주의 나그네가 되어 속세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며 세계사와 구속사는 별개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메시아와 사업에 참여하고 지상의 역사가 구속사업에 참여하려면 지상에서의 인간의 노동이 단지 시련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뜻이 있고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구속사와 세계사가 일치되는 것이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이 설 땅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화와 인간 계발, 즉 복음화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지상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식도 없는 공허한 것이지만 천당을 가기 위해서만 뜻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인간적인 것은 때가 되어 천당의 부르심을 받으면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듯 지상에서 버리고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성의 구속 없이 구영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험에 빠져 있는 영혼을 하나하나 구출하는 것이 구영사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복음화를 신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떨어지는 과실을 바구니에 주워 담듯이 영혼을 주워 담으려는나그네 같은 태도다. 그것은 결코 과수원 주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는 나무에 달린 싱싱한 과실에는 손이 닿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도외시하거나 또는 미워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과수들을 가꾸고 거름을 주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할 것이다. 누구든지 과수원의 주인이 되려면 바람에 떨어지는 과실을 하나둘 주워 모을 뿐만 아니라 과수원을 경영하기 위한 모든 일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사는 나그네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만 부르기에는너무도 비통한 사건이 있다. 다름아닌 순교사가 그것이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이라고 한다. 순교정신을 이어 받으라고 가르친다. 순교정신을 발휘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용기를 준다. 그러나 천상의 승리는 지상의 승리로 이어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순교자가 순교한 것은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그들을 순교에까지 몰고 간 지상의 여러 여건들은 천주의 영광을 가리는 악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이 악한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서 지상에서 그러한 불행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지상의 역사를 전진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순교정신을 이어 받는 길이 아닌가 한다.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들도 순교할 수 있도록 그처럼 처참한 역사가 우리 앞에 자주자주 나타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어지기를 누구보다도 열절히 바랄 것이다. 당파싸움 중상모략 매관매직 인간 대학 권력투쟁 고문 학살 등이 없어지기를 바랄 것이고 정의와 순결과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지상에 가져오기 위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면서 지구를 버리지 말고 사랑함으로써 천상에까지 이끌어 올리기를 원할 것이 아닌가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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