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장될 뻔한 위험스러웠던 시간이 이 순간부터는 고귀하고 근사하게 빛나 주어도 좋을 것만 같아 보였다.
아무리 대대장이 싱글거리며 웃어도 꼭 그랬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자꾸만 말을 하고 싶어했다.
택시에 타서도 나는 뒤를 연신 돌아봤다.
그럴 때마다 차니가 대대장과 그만 이야기하고 나를 봐 줬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숨김 없이 말한다면 난 송두리째 차니를 사랑하고 싶었다.
가까이서 보는 차니는 말 그대로 어린소녀였다.
아직도 추위로 발그레해진 뺨에는 솜털이 뽀얗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비어 버린 눈이라고 대대장이 추억했던 그 눈도 들여다 보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차니는 그것을 감추고 있었다.
그때의 여고생들은 차니가 별로 예쁘지 않다고 했었지만 천만에 말씀, 그녀의 짙은 눈썹과 미려하게 뻗은 콧날과 단정한 입매는 예쁘다는 칭찬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 여고생들은 여자들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자기들보다 차니를 예쁘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까짓 것, 아무래도 괜찮았다.
차니는 내 눈에 충분히 만족하게 가득 차 있었으니까.
『오늘 저녁에라도 놀러와. 차니에게 멋진 너의 이야기를 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겠지.』
자기들의 집이 있는 방향과는 전혀 반대 방향이었는데도 그들은 호의를 보여서 내집 문 앞까지 동행해 주었다.
나는 대대장에게 후배로서의 예의를 갖추어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 떠나는 택시 꽁무니로 손을 몇 번 내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난 절대로 계모라는 인식을 그 어머니에게서 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의 기억 전부는 그 어머니가 내게 야박스럽게 굴었다는 것뿐이 아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많은 날을 집에서 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 계신 날은 내 잔칫날처럼 꿈에서만 먹어보던 캬라멜도 내 입에 직접 미각을 자극하며 들어 있곤 했다.
이럴 때 그 어머니는 꽤나 잘 웃었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내머리르 쓰다듬어 준다든지 코를 닦아 주곤 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아버지가 오래오래 집에 머물러 주기를 나는 얼마나 바랬었는지…, 그러나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벌써 어머니의 태도는 변해 있었다.
그러면 난 당장 최고로 얌전한 아이가 되어 마루도 닦고 밥도 조금만 먹었다. 이렇게 조심하는데도 어머니는 내게 밥을 게걸스럽게 먹는다는둥, 어쩌면 그렇게 더러운 꼴이냐는둥, 짜증을 내시곤 했다.
그러나 내가 생도가 되고부터는 한껏 부드러워졌으며 의심스러울 정도로 잘해 주셨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변해 버린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계모답게 모질다는 것은 나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계모로서의 태도를 거두어 버렸을 때에는 나는 그분을 나의 친어머니와 달리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진우도 이젠 어엿한 청년이죠?』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해서 다정한 비음으로 말을 건네셨다.
『정말 그렇지. 어서 의젓한 장군이 돼야지』
언제나 맘 좋은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이셨다.
『그렇구 말구요. 이제부터 어디 색시감이라도 골라야겠구료』
어머니의 이 말씀에 어린 동생들까지도 힝하고 웃었다.
색시를 고른다는 말은 어린 애들에게도 가슴이 설레이는 말임에는 틀림없다. 나 역시. 나는 곧 차니를 생각했다.
너무 쬐그맣지만 오히려 말처럼 큰 여자들보다 얼마나 여자다운 멋이 더한가! 정말 나는 차니와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을 것만 같았다.
『벌써 색시감이 있는 모양이지? 좋아서 벙글거리게』
어머니는 재빨리 내 낌새를 눈치 채고 말씀하셨다.
『네, 어머니, 그 점에 대해선 걱정 마세요』
나도 오랜만에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여차했다면 나는 차니를 내 색시감으로 미리 공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가 연이어서 한 말씀에 나는 찔끔했다.
『우리 맘에도 약간은 들어야 한다. 몸도 좀 튼튼하고 말이다.』
튼튼하다는 데는 아무래도 자신이 안 생겼다.
그러나 내 색시만은 내 맘에 드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벼르며 얼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이왕 집을 나설 때는 대대장한테로 가자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시내버스를 기다리면서 잘 뇌어 보니 맘을 달리 먹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대대장이 있는 데서 차니와 부딛히는 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내가 차니를 색시감으로 정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대대장에게 알아차리게 하는 것만큼 내게 위험스러운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일급비밀이었으니까.
그래서 친구네 집에서 실컷 지껄이고 음담패설도 속시원히 해 보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