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을 맞이하여 필자는 예수 부활에 관한 연구 결과를 소박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오늘날 신앙인이 취할 부활관을 간단히 밝히고자 한다.
우선 부활사건 자체와 그 사건의 결과를 뚜렷이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 사건 자체는 사학(史學)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 아무도 부활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사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는 더욱이 없다. 부활하신 예수는 시공을 초월하는 삶을 누리시는 분이기때 문이다.
때와 장소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는 사학은 그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뿐더러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학도는 예수부활에 대해서 침묵만을 지켜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부활의 결과로서 시공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있고 그것들은 사학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부활사건의 결과로서 예수의 무덤이 비게 된 것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을 제자들이 체험한 것의 두 가지는 사회의 영역에 속한다.
빈 무덤 발견에 대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사료(史料)는 요한 20장 Ⅰ·Ⅱ·13절일 것이다. 일요일 새벽녘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통곡하고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무덤은 열려 있었고 그 속에는 시체가 없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한 여건 아래에서 만일 예수의 시체가 부패한 채로 매장되어 있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스승의 부활을 감히 주장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리고 빈 무덤 사화(史話)를 후대에 꾸며냈다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두 남자의 증언이 일치해야 그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간수했다.
여자, 더구나 한 여자의 증언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사실 유대인들 역시 예수의 무덤이 빈 사실을 인정했고 다만 그 사실을 달리 해석했을 뿐이다. (마태 27장 62-66절 28장 11-15절)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빈 무덤을 근거로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무덤이 빈 것을 본 마리아 막달레나 혹은 그 소식을 들은 엠마우스의 제자들이(루가 14장 20-21절) 예수 부활을 믿기는 고사하고 당황했다. 이는 빈 무덤에 대해서 다의적(多義的)인 이해가 가능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예수 부활을 확신하고 지중해 문화권에 힘차게 선포하게까지 되었을까?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께서 정치적 메시아로서 집권하는 날을 손꼽으며 그를 추종했었다. 그들은 벼슬 한 자리쯤을 속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원 후 30년경 예수의 비참한 처형을 보게 되자 실망한 나머지「갈릴레아」로 도망쳤다(마르꼬 14장 28절 16장 7절). 이제 예수사건은 끝장났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후 사태는 급격히 반전된다. 실의에 차 고향으로 도망친 제자들이 미구에「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전대미문(前代未問)의 주장을 내세웠다. 예수는 부활했노라고. 도망친 제자들이「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용감하게 예수 부활을 선포한 이면에는 그들을 돌변시킬 만한 체험이 확실히 있었다. 그들은 어떤 체험을 했을까?
예수의 발현을 체험함으로써 제자들이 심기일전 됐다고 신약성서는 한결같이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 발현을 처음 체험한 곳은「갈릴레아」였던 것 같다.
그 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체험을「예루살렘」및「다마스코」등지에서도 겪게 된다.
바오로는 기원 후 55년경에「에페소」에서「코린토」교회로 편지를 띄웠다. 그 서한 14장 3~8절에는 예수 발현을 체험한 사람들의 목록이 실려 있었다. 이 목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5백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발현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55년경에도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 생시에 그를 반대한 친척들 중(마르 3장 21절, 요한 7장 5절) 하나인 야고보 및 교회 박해에 앞장선 바오로 역시 발현을 체험했다고 한다. 즉 예수 부활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사람들도 발현으로 인해서 심기일전하게 된다.
위의 목록에 바오로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그가 예수발현을 체험함으로써 개종한 시기를 32년경으로 볼 때 예수 발현은 약 2년간(30~32년)에 걸쳐 수시로 여러 장소에서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수 발현을 체험한 사람은 추론할 여지도 없이 직감적으로 예수께서는 새로운 삶을 영위하신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그들은 그 확신을 지중해 문화권에 선포하는 데 젊은 혈기를 다 바쳤다.
유대인들은 죽은 이들이 세말(世末)에야 부활하리라고 믿었었다. 그러한 세말에의 부활사건이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서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따라서 예수 부활 선포는 유대교 배경에 비춰 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유의한다면, 예수 발현을 주관적 환시(幻視)로 보려는 심리학적 설명이 얼마나 불충분한가 여실히 드러난다.
발현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전연 존중하지 않고 환상에 속아 넘어갔다고 속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체험자들을 멸시하는 오만불손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주장 이면에는 부활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란 있을 수 없다는 편견이 은연중 도사리고 있다고나 할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제자들은 발현 체험으로서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신이 내포한 의미를 헤아려 보자.
①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큰 인물은 죽은 다음에도 사상적으로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물은 갔지만 사상은 살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상으로써뿐 아니라 인물로써도 현존하시는 분이다.
②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 양식은 시공(時空)에 얽매인 기타 현존 양식과는 판이하다. 그분은 시공의 제약성(制約性)에서 벗어나셨으므로 언제 어디서고 자유롭게 현존하신다. 시공의 부패성에서 탈피하셨기에 다시는 소멸되지 않는 현존을 누리신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다시 죽은 라자로와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셨다.
③ 이 세상의 시공 속에 살고 있는 신앙인은 예수께서 부재하시는 것처럼 느낀다. 그것은 예수께서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 양식을 영위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展望 17號 103~111面 참조)
④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야 있을 세말사건(世末事件)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호라 하셨다는 것은 세말사건이 앞당겨 일어났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역사의 도상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 부활은 세말의 앞당김(世末 사건)이다. 예수 부활은 역사의 목표와 의미를 미리 밝혀 주는 섬광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의 거느리심 아래 사는 신앙인은 벌서 세말의 분위기에 젖어 있다.
⑤ 예수 부활이 세말의 앞당김이라 할지라도 또한 신앙인은 그 앞당겨진 세말에 벌써 참여한다 할지라도 세말은 미래에 결정적으로 도태한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참 모습이 드러날 날, 우리의 진면목이 밝혀질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죽음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고 삼차원을 넘어서는 새 생명으로 통하는 관문이며 역사는 허무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승격될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아끼는 이승의 진선미(眞善美)와 사랑이 소멸되지 않고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승화될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간다.
⑥ 오관과 추리로써는 잡을 수 없는 부활비사(復活秘事)를 20세기의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믿을 수 있다니 스스로 놀랄 일이다. 우리가 벌써 영위하는 세말론적 실존 장차 드러날 세말론적 신천지(新天地)에 대한 확신을 우리 스스로 일으킬 수는 없다.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이 확신을 싹트고 자라게 하신다. 달아나는 시간을 애석히 여기는 마음을 달래시는 주님의 현존, 삶에서 받은 성처를 감싸 주시는 그분의 손길 희망의 앞날을 속삭이는 그분의 목소리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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