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말씀 안 하셔도 알겠습니다. 표현이 안 됐다 뿐이죠. 바탕은 바로 그거예요.』
나는 내 생활 안에 꼬집힘직한 헛점이 잡혔다는 게 꺼림직했으나 서슴없이 대화가 이어지는 데 고마왔다.
『앉아도 괜찮아요?』
내가 그녀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그녀는 다시 후라쉬를 켜서 걸치고 있던 털외투를 깔아 주었다.
『저의 정원엔 의자가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예의 말이 없었다.
어둠과 어둠이 서로 맞대고 휘장을 쳐 놓은 것처럼 밤은 어두었다.
차니가 가끔씩 후라쉬를 치켜 들면 빛이 번지는 범위 안에서 말라 버린 잔디라든지 겨울에서 잎이 푸른 나무들, 그리고 연한 살바람이 색감을 머금을 뿐, 그 외의 모든 것들은(차니와 나도) 조용했다.
『안 추워요?』
내가 싱겁게 말을 꺼냈다.
『아뇨. 서울은 이때쯤 아주 추운데』
『가고 싶은 모양이죠?』
『아뇨』라고 말했다.
『서울은, 제주도는 하고 저는 아쉬워하지 않아요. 아 모두들 제 자리가 있겠죠』
『그럴 테죠』
나는 역시 싱거운 말 외엔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서 말끝을 흐렸다.
『네 정말 그래요』
그녀는 부드러우나 몹시 낮은 톤으로 강조하듯 말하고는 후라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 흔들리는 것에 따라서 내 얼굴과 차니의 얼굴이 번갈아서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했다.
나는 차니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사실은 그녀의 하얀 쉐타 위를 드리운 긴 머리였다.
무릎을 세워서 안고 앉은 조그만 모습에 그 긴 머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컸다.
머리가 그녀의 모든 것의 반을 신비로 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라쉬를 잠깐만 빌려 주시겠어요?』
나는 그녀에게서 후라쉬를 받아 들고 그녀의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라고 있었다.
그녀가 정면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성모상이 새겨진 그녀의 메달을 발견했다.
작은 거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슬도 긁었다.
나는 거기에서 후라쉬를 내리지 않았다. 그것은 차니를 포근하고 평화하게 교육시킨 하나의 생명체로서 내 눈에는 보여졌다.
『아, 이것, 네, 가까이 보세요』
비로소 자기의 목걸이에 내 시선이 박힌 걸 눈치 챈 차니는 바싹 다가앉아 메달을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한 여인이 온화하게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그러나 비통한 어떤 짙은 슬픔을 승화시키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겪은 그런 것이었다.
동시에 또 최상의 환희와 여왕다운 위엄스런 자태를 살포시 눈 밑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마리아라는 한 여인.
세기가 모두 우러른다는 그 여인이 차니와 그 외의 많은 인류에게 무엇을 교육시키는지 내가 굳이 알아야 했을까?
어렴풋이 차니에게서 떠오르는 그것이 어쩜 더 잘 그 여인을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차니는 내게 말해 줬다.
『정말 모든 걸 아까워하지 않았어요. 나의 부모님도 이분처럼 그랬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당신 아들까지 아까와하지 않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분 외엔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분의 아들은 신이 아니었습니까?』
『네. 신이었죠.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아들이 있어요』
그렇다고 틀림없이 경탄할 사실이라고 종교적으로 무지한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여인이 어떻단 말인가? 하는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모든 역사와 그리고 그 속에서 연주되고 노래되는 모든 음악의 근원임에는 틀림없으니까….
나는 다시 그때를 생각했다. 아베 마리아가 늘 내 귓가에 맴돌던 그때를…
『참 아베 마리아는 좋은 노래입니다』
『어머 좋아하세요?』
『네. 그것에 대한 추억이 제겐 대단한 것이었으니까요』
나는 후라쉬로 하늘을 비추며 계속해서 말했다.
『삼촌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저에 관해서요』
『아무 말도…』
『네 괜찮습니다. 그때 차니 친구들이 말해 줬어요. 차니가 그 노랜 잘 부른다고요』
『어머 그랬어요?』
『직접 한 번 듣고 싶어요』
『언제 기회가 있겠죠』
『기회가 필요해요?』
『그럼 어떻게?』
『지금 들려 줄 수도 있겠죠』
『그 노랠 부르려면 부모님 생각이 몹시 나요』
나는 미안했다. 어떻든 그녀에게 부모님의 추억은 슬픈 것이 아니겠는가.
『난 이 메달에서 아빠를 알게 되죠. 그래서 아베 마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던 거예요』부모님 생각이 간절할 때면 그녀는 메달을 만지작거리며 평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특히 아빠 생각이…저는요, 아빠가 미쳤다고 믿어지지 않아요. 아빠는 병든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던 거예요. 허지만 힘이 없었겠죠. 성모님은 그런 아빠를 충분히 보호해 주셨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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