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었다.
어둠 속에 가만히 숨겨진 어떤 힘이 그녀에게 다시 말을 계속하게 했을 때 그녀는 다소 명랑해졌고 확신에 차 있었다.
『성모님이 보호해 주는 사람은 결코 미치지 않아요』
『그러나 저에겐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하게 그랬었다. 알 듯 알 듯하면서도 차니의 세계는 얇은 베일로 가려진 저쪽 편의 것이었다.
그날 밤 그녀의 매달에 가득 담겨진 비밀스러운 걸 많이 엿보긴 했다.
동시에 나는 그녀의 세계에서 살 수 없는 어떤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녀 자체가 나를 떨게 하지는 않았었다.
대대장은 내가 차니와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한 시간쯤 후에 작은 관목 숲을 찾아왔으며 알콜 냄새를 조금 풍기면서 뇌까렸었다.
『진우, 너는 질투한다는 게 뭔지나 알고 있니?』
『네, 충분히』
『그러나 내가 너를 질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큰 잘못이야』
『저두 마찬가집니다. 아무래도 나는 같이 느낀다라는 말의 맛을 모르겠으니까요』
『너의 온 마음이 안 열려 있다고 말하긴 싫겠지』
『어느 정도까지는』
『그 정도를 넘어 선 다음에 그럼 보기로 하자』
이 두 사람은 항상 내게 어리둥절한 정신상태를 조성해 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평범하게 속시원히 이야기가 되어주지 않았는지, 나는 적어도 그 점에 무한한 맘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 세계를 벗어났다.
차니와 대대장은 따뜻이 나를 전송해 주었다. 그들의 세계는 역시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진우야, 너 오늘 상륙할 수 있니?』
졸업 전야를 준비하느라고 바쁜 나를 대대장이 찾아왔었다.
느닷없이 외출 여부를 그는 물어온 것이다.
『차니가 네 시에 도착하는데 나는 도무지 갈 수 없구나』
『차니가 여길 와요?』
『응』
『어떻게 해 봐야죠』
『고맙다. 숙소를 미리 정하고 다음에 같이 여기로 와』
바빴지만 외출이 가능한 토요일이어서 나는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고 시외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데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벌써 나를 알아보고 반가와했다.
무릎을 적당히 덮고 있는 노란 오바가 유난히 주위를 밝게 해 줬다.
긴 머리를 시골 처녀처럼 한 가닥으로 땋아 내린 수수한 모습이 앳된 미소를 돋보여 주고 있었으나 피로해 보였다.
『삼촌은 몹시 바빠서요』
내가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고 한 팔을 그녀에게 둘러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피로하신가 봐요』
『네 부산까지는 괜찮았는데 버스가 좀 험하게 달려서요』
『괜찮겠죠? 숙소를 미리 정하라고 삼촌께서 그러시던데요』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조그만 호텔로 갔었다. 내가 로비에서 반 시간쯤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그녀는 밝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무척 소유하고 싶어하는데 어째서 또 내 자신이 그녀에게 부딪칠까 조바심하는 것이었을까?
그녀가 내 마음을 채우는 게 나는 두려웠다.
어쩔 수 없이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녀는 벌써 내 선각보다 훨씬 깊게 내게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조용했으며 또 별로 말을 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날 밤 파티에서도 그녀는 장미라든지 백합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었다. 이름 모를 풀꽃처럼 청초한 모습을 그림자처럼 대대장 옆에서 시종 보였으나 은연중에 우리 선도들은 그녀를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높다랗게 세워진 링 아취를 건너서 우리들이 높이 받든 건의 그늘을 지날 때 선도들은 기분 좋게 칼을 달깍 부딪치곤 했다.
드디어 물러서자 진짜 샴페인을 터트리는 파티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샴페인을 높이 쳐들었을 때 선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 질렀다.
『대대장 생도의 파트너에게!』 그녀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들판에 숨어 핀 고귀한 꽃이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가장 귀하고 고운 수반에 담기듯이 그녀도 샴페인 병을 들고 여왕처럼 터트렸다.
우리들은 박수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내가 불쑥 내 옆을 스치는 음악부장에게 말을 건네었다.
『바로 저 소녀가 저로 하여금 고기 등에 타고 태평양을 건너라고 속삭인 장본인이랍니다』
『그래? 대대장이 차지했으니 자네 좀 쓸쓸하겠구먼』
『당연하죠. 조카니까요』
『그래? 연인이 아니고? 자, 그럼 용기를 내게』
그는 내 어깨를 탁탁 치고 물러섰다. 그런데 내 동급생들은 야릇한 욕망을 보이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네가 익사할 뻔한 그 아베 마리아란 말이지?』
『너가 차지할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면 아예 포기하고 내게 양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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