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불가지론자들이며 과학은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는 사고방식이 다소 널리 퍼져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사실일까요?
과학의 비상한 진보 특히 지난 2세기에 걸친 과학의 비상한 진보는 때로 인간의 모든 질문에 과학으로 대답하고(인간의 모든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할수 있다는 신념에로 이끌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로봐서는 과학에 대한 신앙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대치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앙과 과학 중에서 선택해야 된다고들 말해왔습니다. 하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다른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연구에 헌신하는 사람은 더이상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반대로 하느님을 믿고 싶은 사람은 진지한 과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돌이킬수 없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과 모순 안 돼
2. 제 3차 바티깐공의회는 대단히 다른 견해를 천명했습니다. 사목헌장에서 공의회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속사물이나 신앙의 내용은 다함께 하느님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하게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해도 만물을 보존하고 만물의 존재를 규정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 되고 있는 것이다.』(사목헌장36)
사실 과학자들이 그들의 과학적 경험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그리고 유리하게 하느님을 언제나 믿어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믿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50년전 세계의 가장 저명한 과학자들 중 3백 98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중 16명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했고 15명은 불가지론자들 이라고 주장했으며 3백 67명은 믿는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Aㆍ에이미어지음「과학의 발전에 따른 신자들의 역할」 6판 참조)
3. 과거와 현재의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가 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진지하고 기쁘게 인식하는 것과 잘 일치될수 있기까지한 이유들을 의식하게 되면 더욱 흥미롭고 유익하기까지 합니다.
흔히 영적일기의 방법으로 과학자들의 과학적 탐구에 따르는 생각들을 보면 두가지 요소가 교차하는 것을 쉽게 보게됩니다. 첫째는 크든 작든간에 극히 엄격하게 수행되는 연구 자체가 끝없는 과정으로 그 다음의
질문들을 위한 출구를 항상 열어 놓은 것입니다.
그 끝없는 과정은 인과율이나 과학적 수단만을 통해서 설명될 수 없는 엄청남, 조화, 목적을 실재속에 드러냅니다. 둘째는 억제할 수 없는 의미에 대한 질문, 더 고상한 합리성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질문이 있는것입니다-사실 내적 필요성을 충족시킬수 있는 어떤것 또는 어떤분에 대한 억제할수 없는 질문-고도의 과학적진보 자체가 이런질문을 없애주기는 커녕 더욱 일으켜 줍니다.
◆흔쾌한 인식
4. 종교적인 긍정에도 발걸음 하는 것은 실험과학의 방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인간으로서 과학자가 생활과 더불어 그리고 연구하는 실재와 더불어 갖는 그의 일상적 접촉 속에 행사하고있는 인과율, 목적, 충족 이유 등과 같은 기초적인 철학 원리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으로 현대세계에서의 파수꾼으로서의 과학자의 조건은, 실재의 놀라운 조화와 함께 엄청난 복합성을 맨 먼저 들여다 보는 사람으로서의 과학자의 조건은 그를 종교의 타당성에 대한 특전적 증인을 만들어주며 초월성을 인정하는 것이 연구의 자율성과 목적을 해치기는 커녕 오히려 인간의 신비를 드러내는 자아초월의 경험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능가하도록 어떻게 자극하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 다음에 만일 우리가 오늘날 특히 생명의 기원자체와 관계되는 광범한 연구범위가 과학적 정복을 올바로 사용하는데 대한 골치 아픈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을 독단적이고 집에서 해방시킬수 있는 확고한 윤리적 판단기준을 과학자들 쪽에서 더욱 자주 요청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각 인간의 존엄성이 확고하게 보살핌을 받고 증진되는 윤리적 질서를 하느님이 아니면 누가 성립시킬수 있겠습니까?
크리스찬 종교는 과학이 합리적이라는 미명아래 어떤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의 선언을 생각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과정에 엄격하게 주목하지 않는 경향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에 관한 긍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똑같이 확고합니다.
◆긍정의 이유들
5. 이점에 대해서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이유들을 어떤식으로 들어보고 그들의 하느님과 인간과 삶의 커다란 문제들과 높은 가치들과 어떤 인격적인 관계로 지탱되고 있는지를 보면 대단히 감동스러울 것입니다. 침묵, 명상, 독창적 상상, 물질적 사물로부터의 평화로운 무욕, 발견의 사회적 의의와 마음의 순수함이 그들을 의미의 세계로 열어주는 요인들일 때가 아주 잦습니다.
그러한 의미의 세계는 진리를 향해 동일한 충실성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어느 누구도 무시 할 수 없습니다.
몇년 전에 작고한 이태리 과학자 앤리꼬 메디에 대해서 한마디 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1971년 로마에서의 국제교리교육대회에서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젊은이에게 말합니다. 보시오. 1억광연 멀리 새로운 별, 은하수, 중성자별이 있지만 거기서 발견되는 양자전자, 중성전자들이 이 현미경 속에 발견되는 것들과 동일합니다. . . 동일성은 개연성을 배제합니다. 동일하다는 것은 있을 것이다…가아닙니다. 따라서 공간밖에, 시간밖에 하나의 원인, 이런 방식으로 걷게 하도록 존재를 만든 존재의 주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하느님입니다-수십억광년 떨어져서 동일하게 있도록 존재들에 원인을 부여한 존재-나는 과학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주 속의 동일한 미립자들의 수는 10에 85곱하기입니다…그러면 우리는 은하수의 노래를 듣고싶읍니까? 내가 만일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라면 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 거대한 하늘의 은하수여, 나의 주님께 찬미를 드리라. 그분은 전능하시고 선하시니 오 원자들이여 오 양자들이여 오 전자들이여 오 새들의 노래여 잎사귀와 공기의 하늘거점이여 기도하는 사람의 손 안에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찬미가를 부르라!』(1971년 9월 20~25일 로마 제 2차 국제교리교육대회 결의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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