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또의 이름은 대단히 유명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베네딕또의 전기를 쓴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그가 그의 이름대로 「은총을 받은 자」「강복 받은 자」로서 은총과 본성이 잘 조화된 자였다고 말했다.
성인은「눌시아」라는 조그마한 시골에서 480년에 출생했다. 귀족 가문으로서 경건한 크리스찬이었던 그의 부모는 딸 스콜리스띠까를 이미 소녀 시절에 하느님께 바치고 수녀원에 맡겼으며, 아들 베네딕또는 대학 공부를 위해「로마」로 보내었다. 열네 살까지 전원에서 자라난 성인은 유모와 함께 영원한 도시「로마」로 왔을 때의 충격적인 인상은 말할 수 없었다.『세상의 로마가 이렇게 훌륭하다면 천상「예루살렘」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당시 로마의 문화와 예술은 훌륭하였으며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찬양할 정도였다. 베네딕또가 얼마나 오랫동안「로마」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학업을 중단한 채「로마」를 떠났다.
조숙하고 신중한 성격을 가진 그는 어린 시절의 바탕이 된 시골의 가정 교육과 엄격한 종교교육의 영향 때문에 학문과는 멀리 향락에 빠져 사는 동료들이 너무나 생리에 맞지 않다고 은수생활에의 동경이 그의 이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고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로마」에는 식스투스3세가 세운 성 세바스티안 수도원 외에도 여러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는「로마」의 수도원에 입회하지 않았다. 이미「로마」의 수도원들이 세속화하여 정치적인 문제까지 참관했기 때문에 성인의 이상과는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유모와 함께「로마」를 떠나 동쪽으로 50㎞ 떨어진「아필레」라는 조용한 마을로 옮겨 갔다.
많은 은수자들이 속세의 번잡을 피해 이 조용한 곳으로 찾아와서 규칙도 없이 함께 모여 영적 독서 담화 기도 등을 하며 살고 있었다. 얼마동안 베네딕또는 그들과 함께 있었으나 이곳에서도 역시 곧 실망을 느꼈고 더욱이「로마」의 바실리까 수도원 생활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베네딕또가 원한 수도생활은 세상에서부터 완전히 떠나 고행과 고독으로 지내는 생활이었다. 마침내 그는「아필레」와 유모를 떠나 혼자서 고독을 찾아 첩첩산중「수비야꼬」로 갔다. 오늘날까지「아필레」의 교회 문 앞에는 체가 걸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 온다. 성인의 유모가 어느날 밀을 고르기 위해서 이웃 동네 부인에게서 체를 빌렸다. 그런데 유모의 부주의로 체가 굴러 떨어져 댕강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녀는 슬피 울었다. 유모가 우는 것을 본 경건하고도 사랑스런 어린 베네딕또는 동정이 갔다. 그는 깨진 체 조각을 들고서 기도를 했다. 그러자 깨진 체가 다시 온전한 체로 변하였던 것이다.
베네딕또가 이번에 찾아간「수비야꼬」는 대단히 험하고 경사진 길이었고 바위와 숲들이 울창한 깊은 산중이었다. 부근에는 이미 많은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세우고 살고 있었으나 베네딕또는 완전히 혼자 살고 싶었으므로 로마누스라는 수도자에게 수도록 한 벌을 얻어서 3년간 은수했던 저 유명한 동굴 생활로 들어갔던 것이다. 로마누스는 나이가 많아 험한 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매일 먹을 것을 넣은 바구니를 줄에 달아 동굴 밑으로 내려 주었다. 얼마동안 베네딕또는 이곳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활주일날 좋은 음식을 갖고 찾아온 수도사제 하나를 만나게 되어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그는 기쁨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그 자신도 고독의 생활이 쉬운 생활이 아님을 깨달았다. 더구나 성인은 육체와 싸워야 했고 그곳을 떠나 환속하고 싶은 유감까지 겪었다.
그러나 그는 이 유감을 이기기 위해 보속으로 근처에 있던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들어 뒹굴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는 아무 데도 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가시덤불은 장미나무로 변했으며 오늘날까지「수비야꼬」를 찾는 순례객들에게 이 이야기를 상기시켜 준다. 성인의 명성과 성덕은 나날이 높아가기 시작했다. 은수자들이 모여 살던 수도원의 아빠스가 죽자, 그들은 성인을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청했다. 반면에 성인의 성덕이 점점 드러나자 그들은 성인을 질투하여 죽일려고 독약이 든 잔을 주었다.
그가 강복하려고 할쯤 그 잔은 깨어지고 독사뱀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은수자들을 모아 수도원을 세우려고 하던 계획을 포기하고 성인은 그곳을 떠나 단체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다. 이제「수비야꼬」에 세워진 수도원은 훌륭하게 발전했다.
「로마」에서부터 많은 세자들이 그의 교육과 지도를 받으려고 줄지어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자 그를 질투하는 이들과 원수까지도 생겼으므로 또 다시 그곳을 떠나 후에「로마」시가 되었고「로마」와「네아펠」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몬테까시노」로 갔다. 때는 대개 530년경으로 그의 나이가 50세였었지만 아직도 왕성한 정력과 많은 경험을 갖추었던그는「몬테까시노」에 교회와 수도회를 짓고, 인근 주민들을 그의 복음 강론을 통해서 크리스찬적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그의 유명한 규칙(REGULA)을 쓴 곳도 이곳이다. 많은 이들이 성인과 담화하고자 모여들었다.「몬테까시노」언덕 아래는 그의 동생 스콜라스티까가 살고 있었다. 두 남매는 매년에 한 번씩 만났는데 길이 험해서 성인이 꼭 동생에게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만났을 때 여동생은 임박한 자기의 죽음을 알고 오빠가 계속 있어 줄 것을 청했으나 수도원의 규칙을 내세우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스콜라스띠까가 잠깐 기도를 하자 갑자기 천둥과 함께 폭우가 쏟아져 자연히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3일 후에 동생은 죽었다.
동생의 뒤를 따라 성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547년 3월 21일이었다. 죽음이 가까와 옴을 알자 그는 무덤을 열게 하고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즐겨 기도하던 성무일도를 바치려고 성당으로 옮기게 하고 그곳에서 성체를 모시고 제자들이 그의 손을 받쳐 준 가운데 선 채로 기도하면서 영혼을 하느님께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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