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자신이 만만해서 시무룩해 있는 나를 떨궈 버리고 한구석에서 대대장하고만 미소하고 있는 차니 쪽으로 우루루 밀려갔었다.
그러나 그녀를 어느 한 사람이 소유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대대장처럼 신비한 어떤 세계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젖어들지 못하는 한 결코 그녀가 우리들을 위해서 존재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야, 걔, 참 인상적인데?』
동급생 한 명이 내 곁으로 돌아와서 경의를 표했었다.
『뭐라고 말할 순 없어. 특별한 매력은 없단 말야. 그러나 신선해』
『왜 그래? 너를 사랑한다고 열을 내던?』
나는 끝내 무뚝뚝하게 심통을 부렸었다.
『천만에. 뭐라고 해도 웃기만 해』
『그러니까 자네보다 내가 더 용이지 뭔가? 나는 그녀 때문에 죽을 뻔했지. 그뿐야? 바로 두 달 전에 심야에 데이트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뭐 양보를 해야 된다고?』
『진우, 진정하게. 어디까지나 우리의 공론이란 점에 유의해야지』
『어떻든 오늘의 여왕은 노란 미나리 아재비가 차지했는데? 저 장미들과 백합들이 시들하게 보이잖아? 진딧물이 잔뜩 낀 그런 꼴 말야』
누군가가 콜라를 들고 한숨을 쉬었었다.
『지나친 혹평은 선배 연인들에게 금해 있다고. 벌칙 받을라』
『보따리 싸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이런 경우 벌칙도 반갑지』
한가한 농담이었다.
그 농담 속에 축축한 연정과 강한 시선을 뒤범벅해서 콜라와 함께 들이마시며 몇 명은 진지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날 졸업식을 마치고 차니와 대대장은 떠나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계속 두꺼운 미련을 지녔으나 건성으로 체념하고 있었다. 체념하는 동안만은 내가 매우 홀가분하게 내 삶을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6·25의 부산물인 한 혼혈아와 열애를 했다.
그때 벌써 나는 해군사관학교를 마치고 가까스로 해병 소위로서의 권리를 내 부하들에게 주장할 수 있었던 무렵이었다.
부대 가까이 있는 다방의 종업원이었던 그녀는 휴일에 내가 외출해서 귀대할 때 들리는 그 시각쯤에 항상 미소를 준비했다가 내게 퍼부어 주었다.
그녀는 어느새 내 옆에까지 자리를 잡게 되고 솔직히 내가 좋아진다고 했다.
어느날 같이 시내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는 연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끈적끈적한 젖은 매력으로 나를 끌었다.
언제가 큰 부담을 주던 차니 같은 신선함을 나는 그녀에게서 느껴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가볍게 내 턱 밑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천박한 여자다운 기질을 보이는 그것이 훨씬 나에게는 어울렸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터로 떠나야 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한다는 역사적인 긴장감과 사실 생명 따위는 아예 보장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허탈한 마음이 겉으로 보기에 내 전부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부산 제3부두는 붐볐었다.
많은 인파가 출렁이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단 한 사람도 아는 얼굴을 찾아 낼 수 없었다.
내 연인이었던 혼혈아는 굉장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녀는 철새처럼 훌쩍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난 전쟁터로 떠나지 않으면 안 돼』
『그럼 나도 당신을 떠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건 자유야』
『부자유스러운 건 제가 날 때부터 없었어요』
『그래도 우린 사랑했잖아』
『사랑은 잠시 동안 머무는 거죠』
『흥』
『내가 낳아진 것처럼』
『우습군』
이런 대화가 오고 간 그날 오후 그녀는 다시 그 자리에서 미소를 준비하고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었다.
홀가분하긴 했다.
문득 외롭고 쓸쓸한 상태를 구축함이 먼 전쟁터에 닻을 내릴 때까지 느껴야 했으며 더구나 오래 잠재되어 있던 차니가 갑자기 뇌리에 떠올라 나를 괴롭게 했다.
몸을 동그렇게 옹크리고 앉아 긴 머리칼과 금메달을 인상 깊게 해 줬던 그 어두운 밤의 일은 더욱 애잔한 파문을 던져서 감상적인 기분까지를 주었었다.
전쟁터까지 줄곧 일주일 동안을 나는 군함의 밑바닥에서 보냈었다.
나는 용감하지 못하게 자꾸 옛날을 추억했으며 그 속에는 반드시 차니가 웃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때의 대대장과 나는 질투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이제쯤 다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이 지나치자 나는 싱거워서 웃어 버렸다.
신나게 카니발 기분까지 동원하는 적도제(적도를 통과할 때 지내는)도,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선배들이 거둔 공적을 상세히 브리핑하는 교육시간도 그저 시큰둥하게 지냈다.
은근히 획기적인 신바람 나는 그 무엇이 터져 주기를 바라면서도 마음 같지 않게 나는 시들어 있었다.
그때 어디서 잠수함이 나타나서 배바닥에 아가리를 내놓는다고 해도 결코 나는 구명조끼를 사양했을 것이다.
『에이, 왜 몇 년 전의 캐캐묵은 차니냐 이왕이면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내 코 끝에 턱을 들이대고 아양 떨던 그 튀기년이 아니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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