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됐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소. 그러나 그녀는 나의 공산주의 이론 때문에 감정이 상했고 나는 천주의 섭리 안에 인생만사를 해결하려는 그녀의 맹목적인 신앙과 단순한 인생관 때문에 신경질을 내기도 했소. 우리는 서로 만나는 것을 진정 바랬으나 만나면 상반된 사상 때문에 심한 토론과 때로는 언쟁까지 하기도 했소.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수 없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에게 청춘의 고민과 고독만을 더욱 안겨 주었소.
조국이 해방된 지 2년 후 그러니까 1947년의 가을 그녀의 가족은 자유를 찾는다는 구실 아래 남조선으로 남하했소. 그때 그녀는 자기 가족과 함께 남하하는 것을 거절했고 자유보담은 차라리 사랑을 선택하겠다고 자기 부모님께 말하고, 계속 평양에 남아 있었소. 물론 나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소. 가족과 함께 남하하기를 강요하는 자기 아버지에게 그녀는 무신론에 포로가 된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선교사가 된 사명을 갖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말했다고 했소. 그뿐만 아니라 천주를 몰아낸 붉어진 이 땅 위에 사랑을 통해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도(使徒)가 되겠다고 나에게도 말했소. 그 후 나는 인민군 사관학교에 입교하라는 당의 지시를 받고,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그녀는 간호원이 되어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소. 전쟁이 발발할 무렵 나는 인민군 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지난 8월 중순 낙동강 지구 전선에 출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선으로 출동하였소. 출동 전날 밤 나는 그녀를 숙소로 방문하고 우리 둘이는 결혼했소. 하룻밤의 결혼생활이 주는 이 강렬한 기쁨 속에 우리 둘이는 과거의 사상적 대립 때문에 사랑을 의식적으로 멀리한 서로의 고집을 얼마나 후회했었는지…그리고 우리를 헤어지게 하는 이 전쟁이 정말로 원망스러웠소. 미군 항공기의 공습 아래 방공호에서 보낸 두 시간은 그처럼 길었으나 애인과 같이 보낸 하룻밤의 시간은 야속하리 만큼 짧았소.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사랑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고,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룻밤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기쁘게 지내려 힘썼소. 그녀는 나를 위해 천주의 가호를 빌었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단란한 가정을 꾸밀 것을 약속했소. 그러나 그녀의 사랑도 기구도 천주의 보호도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의 약속도 몇 발의 총소리 앞에 영원한 종식을 고하고 말 것이요. 그리고 죽음과 함께 내 사랑하는 조국도, 민족도, 내 이상인 공산주의도, 내 사랑하는 여인도 회복할 수 없는 영원한 망각 속에 사라지고 말겠지…』
그리고 그는 촛물을 흘리며 여전히 타고 있는 촛불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면 완전히 타 없어질 이 촛불, 이 촛불의 밝음이 암흑에 에워 쌓여 사라질 무렵 김 상위의 생명도 몇 발의 총성과 함께 이 지상에서는 존속하기를 그칠 것이다. 그의 두 눈 언저리는 습기가 돌고 있었고, 촛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그의 양뺨을 타고 흘렀다. 그동안 짐승처럼 악을 쓰던 박ㆍ노 두 포로들도 조용히 김 상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쩐지 나도 슬퍼졌다. 몇 주일 전에 원산서 헤어진 애인이 보고 싶고 그리웠다. 김 상위의 과거는 내 자신의 과거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나 자신이 죽는 것 같은 느낌에 온 몸이 오싹 추워 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