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과학만능의 사상
현대 문명은 물질주의사상과 과학 만능의 사상이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풍요한 물질의 개발을 위해서 과학 기술의 발전이 필요하고 또 과학 기술의 고도화로 인하여 가시적 인간 문화의 발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원래 교회와 과학 세계와의 관계는 예로부터 숱한 곡절이 있었다. 즉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배치적 관계에 있는 것 같이 상념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차원에서보다는 오히려 과학이 종교를 우선한다는 하나의 과학 우상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과학은 원래 신의 창조 신비를 인간의 연구 노력으로 점차로 알아내서 인간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를 차츰 더 캐냄에 따라 드디어 과학은 그 오만성을 드러내어 과학 자신이 마치 신비를 창작하는 양 신의 창조 신비 자체를 무시 내지 무용화하려는 지극히 불손한 태도로까지 나오고 있다. 이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대중에게는 어느 정도의 호소력을 갖기도 하고 또 설익은 사이비 과학자들에게 종교 배격의 부당한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우주의 신비를 더욱 절감하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자의 정도 높이에 따라 그 신앙의 깊이가 더하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떼이야르 드 사르댕 신부의 진화론적 창조설의 신학론에서 과학과 신학의 조화를 아름답게 나타냈음을 보았을 뿐 아니라 달세계 착륙에 성공했을 때 이를 총지휘했던 우주항공본부(NASA)의 브라운 박사는 로켓을 발사하여 우주선을 상공으로 올려 보낸 직후 운집한 신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단 한마디 말로서『이제 남은 것은 오직 기도뿐이다』고 대답한 것은 실로 천구의 명언이요 금세기 최고 과학자의 최고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언필칭 과학을 내세우면서 종교 무용론이나 신부재의 망설을 논하는 자들에게는 정문의 일침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볼 때에 교회는 과학을 복음의 빛으로 조화 있게 받아들이는 데 더욱 용기를 낼 것이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두려워 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릇된 과학만능의 장애적 요소를 과학적 역할로 전환한다면 그야말로 과학적(?) 복음화의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③안일주의와 쾌락지상의 사상 안일이나 쾌락은 누구나가 원하는 인간 본능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이마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여 인간의 안일성을 금했고 또 아담에게『네 한 평생 줄곧 너는 큰 수고를 하여 거기서 먹을 것을 얻으리라』고 명하여 인간의 쾌락욕을 제한했다.
교회는 유사 이래 이 하느님의 지상수리에 따라서 인간의 안일쾌락의 추구욕과 노동고통의 신비성 사이에 부단된 긴장을 유지하면서 적당한 조화를 모색하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앞에서 말한 물자 문명과 과학 문명의 발달은 안일과 쾌락의 쌍태아를 낳았다.
풍요한 물질은 관능적 쾌락을 용이하게 하였고 또 고도화한 과학 기술은 인간 생활을 극도로 편리하고 안역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억제되어 왔던 안일과 쾌락의 욕구는 일단 탈출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방을 달린다.
이것이 오늘의 사회상이다. 또 이것은 교회가 과거에 금과옥조로 알고 왔던 수고수난의 신비나 고신 극기의 수덕 가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여기서 교회의 복음화는 중대한 애로에 봉착한다. 안일의 정신은『르라』는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부합되지 않고 또 쾌락 위주의 사상은 청빈을 완덕의 표본으로 삼고 있는 복음의 가르침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일은 태만을 낳는 동시에 쾌락을 갈구하는 것을 그 본질적 성향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일과 쾌락은 사실상 동의어에 불과한것이다. 또 이것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물질과 과학 기술이 소산인 만큼 이른바 경제적 선진국일수록 그 도는 더욱 심하고 그 반대인 소위 선진도상국에서는 아직도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도상에 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의 속도보다는 관능주의는 가속도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의 성론리의 타락과 인간 관계의 소외를 초래하였다. 즉 인간은 자유성(FreeSex)의 도구화되고 물질과 기계의 예속물화되어 인간의 존엄성은 경시 당하고 자연법의 질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무서운 복음화의 장애물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겠는가? 참으로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교회는 안역한 타협을 허락한 수덕주의(Asceticism)는 어느 정도 지양할지라도 육적 쾌락주의에 방치하는 것은 교회서 복음화 사명을 포기하는 결과가 된다.
교회는「소돔」과「고모라」의 파국을 가져 올 운명이 분명한 이 상황을 어디까지나 예방할 지상의무가 있다. 마치 세례 요한의 헤로데왕의 불륜을 고발하는 결사적 예언직을 본받을 만한 용기가 요구된다. 다시말해서 이 가공할 적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은 있을 수 없고 오직 극복만이 있어야겠다. 그것은 부단한 정면 공격과 우회적 예방 조치가 적진과 아진에 동시 병행돼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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