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ㆍRㆍOㆍTㆍC(해군학도 군사훈련단) 출신이었던 미네소타주의 법학도 마론이 끝내 멋지게 갈겨 쓴 집 주소를 내 손에 떨어뜨리고 떠난 지 몇 달이 안 되어 우리도 월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었다.
내가 만 11개월 동안 지축을 울렸던 전장은 평화스러워지려 하고 있었다. 물론 아오자이 자락에 매료되었던 병사들은 더러 눈물도 흘렸다.
그리고 유명한 코메디「웃기네」도 있었다.
그 아가씨들은 손 끝에 흰 손수건을 잡고 부어오른 눈으로 애써 자기의 애인을 바라보며 그 요절할 장난꾸러기 애인이 가르쳐 준 대로 배가 기적을 울리자「웃기네」를 송별사 대신 한 것이다.
좋았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도 역시 좋은 것 중의 일품이었다.
나는 개선용사였다.
내 부하들은 그을린 얼굴로 삐죽이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가슴에 달려 있는 훈장 수만큼씩 저마다 자랑거리가 늘어서 대견해 했다.
모든 신문들이 우리를 모두 장군으로 칭송해 줘서 그것도 맛봄 직한 고마운 것이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망울을 열고 있었다.
몹시 낯설게 달라진 국도는 희안하리 만치 정연하게 미를 더하고 아직 아물지 않은 붉은 흙이 제 색깔로 열려 있는 이른 봄.
조금 싸늘한 바람은 노란 꽃잎 사이를 용케 빠져서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이른 오후 나는 귀국해서 휴가를 맞은 것이다.
『토요일 오후라면 우리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집에서 며칠 쉬는 동안 민 대위에게서 보내 온 회답을 쥐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김포가도는 아직도 겨울이 머물러 있었으나 개나리는 그 속에서도 부풀어 있었다.
대대장- 아니 지금은 민 대위-을 만난다는 기쁨으로 나는 가슴이 뛰었었다.
그의 눈은 어느 정도일까? 혹시 지금까지 붕대를 칭칭 동여매지는 않았을까. 내가 유진우라는 걸 어떤 방법으로 알려 준담? 오라. 그의 마음의 눈을 믿자.
공상과 설레임이 범벅이 되어 나를 몹시 어린 소년으로 만들어 주었다.
멋지고 말쑥한 해사 생도였을 때부터 굉장히 오래고 지루한 그러나 별로 의식치 못한 시간 뒤에 새삼스러워진 자세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었다.
띄엄띄엄 환자들은 혼자서 혹은 휠체어로 목발을 짚고 토요일의 맑은 오후를 보내는 모습이 정문을 들어서서 반듯한 병원 본관까지 걸어가는 사이에 볼 수 있었다.
접수계는 친절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간호 장교가 엷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같은 중위였으나 나는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민 대위님 지금 산책 중이세요. 이 본관을 오른쪽으로 반듯하게 돌면 산책로가 있어요』
『그럼 거기로 가 보죠. 감사합니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른쪽으로 오그라들어서 서서히 산 밑으로 뚫린 오솔길을 걸으면서 나는 다소 안정되어 있었다.
좋은 기분.
내가 늘 멜랑꼴리해 있다고 어이없어 하던 그에게 장군다운 이 기분을 선사하자고 뻐기기까지 하면서 한참을 걸었었다.
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간호원이 뒤에서 밀고 있는 환자는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더구나 붕대로 눈을 칭칭 동여맨 사람은 거의… .
나는 손을 모아 소리 질렀다.
이른 봄바람은 내 목소리를 둥그렇게 휘감아 주었다.
내가 소리 지른 한참 후 산울림이 울려 왔다.
『민 대위니님…』
반대쪽에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나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놀랐다.
분명히 차니였다.
민 대위를 부축하고 걸어오는 수녀는.
나는 반가왔다.
그러나 와락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훈기형, 차니… 』
순간 와 하는 탄성이 내 이성을 극복하게 해 주었다.
『진우지? 진우구나, 오랜 만이야』
그와 나는 끌어안았다.
나는 소리내서 엉엉 울었다.
도대체 나는 모르는 것, 모르는 세계를 다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 훈장 많이 탔어?』
민 대위의 병실은 좁고 그리고 평범하면서도 안온했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거짓말 같이 옛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 눈이 상해 있었다는 것이다.
빈 눈-눈이 빈 것은 순수하다는 것이라고 그가 옛날에 내게 말해 줬다.
『난 도무지 전부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는 없군요. 그러나 뭔가… 』
나는 그의 단아한 용모에 깃든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뇌까렸다.
영상이 맺지 않아도 되는 그 눈을.
『진우, 그래. 전부 그런 거야』
차니는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긴 머리 대신에 검은 베일이 그리고 메달이 자리하던 가슴께에는 은십자가 아니 모든 걸 검은 옷자락에 묻고 있었다.
아베 마리아가 갑자기 다시 들려오는 오후였다.
내가 경부선 기차 안으로 들어갈 때 병원에서 역까지 같이 와 준 그녀는 내 시선을 뛰어넘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어떤 것도 아깝지 않은 거예요. 사랑 말예요』라고.
문득 고개를 든 내 눈이 그녀와 부딛쳤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처음 본 그 눈은 대대장의 눈이었습니다.
그 빈 눈으로 그녀는 나를, 아니 대대장을 교육하고 있었다. 기차는 밤을 달리며 내 내부에 끈덕지게 살아온 짙은 향을 꺼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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