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해 동안 앓아온 신병(방광암)을 치료하기 위해 금년 3월 미국으로 건너갔던 찰스 매우스(한국명=차매우ㆍ샬미스트 회원) 신부가 지난 5월 7일 65세를 일기로 끝내 주의 품에 안겼다.
그가 생전 15년간 몸담아 왔던 대구 까르멜수녀원 내 사제관에는『사랑이 내 생명의 껍질을 닳게 하지는 않을 것이나 갑자기 파열해 버릴 것이다』는 그의 마지막 말을 적은 쪽지와 한국어를 공부하던 30여권의 노트만이 남아 고인의 생시를 조용히 말해 주고 있었다. 항상 겸손과 웃음 속에서 기도와 희생 노력과 봉사로 이어진 차 신부의 생활은 한마디로『사제다운 사제의 길을 걸은 훌륭한 귀감』이라고 원장 엘리아ㆍ데레사수녀는 회고한다.
『티끌 모아 태산』을 좌우명으로 삼고 언제나 묵주를 손에서 떼지 않았던 차 신부는 작은 희생 작은 순명 작은 기구를 모아 태산을 만들자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몸소 실천했다고 들려 준다. 한때 미 군목으로 있으면서 잘 아는 군인 친구들이 몇 번씩이나 초대했지만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다 한다. 그것은 진수성찬에 유쾌한 오락기구들이 자신의 사제생활에 유익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동서의 피안」(오경웅 저, 김익진 역) 글 중에서 익살꾼 존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차 신부는 1909년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젊은 신학생으로「루르드」에 순례 갔다 돌아오는 차 중에서 그는 우연히 중국인을 만났다. 「빠리」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 중국인을 신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그는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중국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인은「로마」에서 주교 서품을 받고 중국으로 돌아가던 해문교구의 주희맹 주교(중공 치하 때 순교)였다. 젊은 신학생의 설교에 감동한 주 주교는 그를 중국으로 데려가 거기서 사제서품을 주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
서양서 태어나긴 했으나 중국인으로 귀화하여 공자 맹자는 물론 당시(唐詩)까지도 본국인을 능가하던 차 신부는 1955년 중공군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면서 추방, 다시는 중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됐다.
차 신부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벨기에에 돌아가 있던 중 루디 신부와 함께 한국에 오기로 됐던 끌로우드 바시땡 신부가「몽블랑」정상서 조난, 죽게 되자 친구 대신으로 한국 선교를 결심했던 것.
1957년에 한국에 나와 금년 3월까지 17년 간을 대구에서 살아온 차 신부는 남달리 인정이 많았다. 차 신부와 함께 11년 간을 지내왔다는 이마리아(65) 노인은『11월에 꼭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면서 다시 한 번 차 신부를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맺힌다고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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