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J신문 문화부 기자 유승애의 전화를 받은 것은 남편의 전람회 마무리를 가까스로 끝낸 어제 목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남편 권세연은 일주일 동안 열리는 전람회 날짜도 채우지 못하고 서울에 온 지 사흘 만에 덕소(德소)로 내려가 버렸으니 뒷처리는 의당 선경이가 선두에 나서서 지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경이도 이제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가 아니요 광화문 큰 거리에서 벌이고 있는 큰 책방의 여주인이고 보니 그만한 일에 허둥대거나 하지는 않는 입장이긴 했으나 역시 화가의 아내라는 것뿐이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아닌 이상 책방 다루듯이 능숙하게 처리할 수는 없어 뜻밖의 힘이 든 셈이지만 스승의 일을 자기네 일로 알고 달려와 준 세연의 제자들의 힘으로 그럭저럭 무사히 끝맺게 되었다.
더구나 출품된 작품이 워낙 50호 안팎의 작은 것들이라서였는지 전시 작품이 단 한 폭도 남지 않고 매진되어 버렸으니 오랜만에 경사가 겹친 셈이었지만 선경으로서는 일방 가슴 속이 허전하기도 했다.
남편의 이번 그림이 한 폭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어쩐지 서운하고 허무한 일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림을 산 사람들의 주소 성명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기로 했다. 아무 때고 남편의 그림을 보고 싶을 때 그림 소유자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텔레비 방송 신문 잡지 등에서 끈질긴 인터뷰 교섭이 왔지만 그럴 때마다 선경은 공손히 사양해 왔다.
인터뷰 요청에 응할 세연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미 덕소에 내려가 숨어 버렸으니 선경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J신문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선경의 힘으로도 어쩌지를 못했다.
처음 J신문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서점의 김 군이 메모를 읽어 줄 때 선경은 말했다.
『집에도 전화가 왔길래 그렇게 말했지만 매스콤 관계 전화는 모두 사양하라고 그러지 않았어』
『그러긴 했죠. 하지만 J신문만은 꼭 사모님을 만나뵈어야 하겠다는 거예요』
『나를? 나를 만나서 무얼 하자고. 나야 책이나 팔 줄 알지 그림에 대해서야 아는 게 있어야지』『하여간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사모님이 언제 서점으로 오시느냐고 하기에 시간을 알려 줬으니 아마 곧 걸려 올 겁니다』
그런 소리르 주고받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고 J신문 유승애라는 것이었다.
선경은 마음을 정하고 전화 받기로 했다.
『여보세요. 전화 바꾸었습니다』
선경이 말하자 전화 저쪽에서는
『죄송합니다. 이 선생님. 제가 너무 끈질기게 굴어서…』
맑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차분한 여운을 남기면서 울려왔다.
선경의 귀에는「이 선생님」이라고 자기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어쩐지 낯설었다. 서점을 꾸려가는 한편 자그마한 교과서를 취급하는 출판사를 경영한다고 해서 이따금씩「사장님」이란 거북한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귀에 익은 호칭은 언제나「사모님」혹은「아주머니」가 통례로 되어 있는 선경에게「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었다.
『저는 J신문에 있긴 합니다만 선생님께서 골치를 썩이시도록 전화를 건 것은 신문사 일로서가 아니라 저 자신의 일을 외람되게 의논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제게 말입니까?』
선경은 머뭇거리면서 반문했다. 생면부지의 젊은 여성, 그것도 J신문 같은 일류지에서 활약하는 여성이 왜 하필 이름도 없는 자기 같은 여자에게 무엇을 상의하겠다는 말인지 선경으로서는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많이 생각한 끝에 선생님을 꼭 뵈어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니 부디 제 청을 거절하지 마시고 시간 좀 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
『시간이야 있습니다만…』
『우선 제 소개부터 간단히 해야겠군요. 저는 권세연 선생님의 제자의 한 사람인 윤흥노라는 사람과 약혼을 한 유승애입니다만 약혼은 했지만 어쩐지 윤흥노 씨에 대해서 점점 모르는 점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선경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유승애가 의논해야겠다는 문제의 골자가 어슴프레하게나마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아, 네. 윤흥노 씨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장래가 촉망되는 분이라고 권 선생이 노상 칭찬하시더군요. 요전엔 전람회 때에는 많은 신세를 졌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그 윤흥노 씨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 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 바로 그 문제 때문인 걸요. 저는 날이 갈수록 윤흥노 스스로가 오리무중에서 숨가꼭질만 하는 것 같아요』
『윤흥노 씨에 관해서는 제가 뭘 알아야죠. 우리집 양반이라면 잘 아실 테니까. 그럼 이럭 허십시다. 내일쯤 덕소에 같이 내려가시죠』
『선생님,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그런 일이라면 힘이 돼 드려야죠. 마침 내려갈 일도 있으니 그렇게 하십시다. 내일 열두 시까지 저희 광화문 서점까지 나와 주세요』
선경은 유승애와 시간을 약속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