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ㆍ통조림 등 남편의 일주일분 식량을 골라 담던 선경은 지금쯤은 커피도 떨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짐짓 다행스러웠다.
역시 나이 탓일까.
그렇게도 잠시를 쉬지 않고 들이키던 술을 슬그머니 멀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침에 눈이 뜨이기가 무섭게 소주병째 들이키던 남편은 심지어 학교 강단에서도 술냄새를 풍기는 것은 으레 당연지사로 여겨지던 지난날…
누구의 어떤 말로도 끊을 수 없던 술이건만 웬일인지 몸 속에서 받지를 않게 되었으니 자연 흐지부지 끊게 돼 버린 것이다.
남편 곁에서 술병을 볼 수 없게 된 요즘이 선경으로서는 얼핏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생각하면 이것 역시 오묘한 섭리였던 것만 같아 그저 흐뭇하기만 하다.
백화점에서 나온 선경은 커피 치즈 같은 바다 건너 온 물건들을 단골로 팔아 주는 가게 쪽으로 가는데 길가에는 즐비하게 바나나 장사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 바나나의 철인지는 몰라도 저렇듯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니 씹는 수고가 별로 없어서 좋다는 남편 말이 생각 나, 싱싱하고 실한 것으로 골라 한 무더기 사 넣기로 했다.
초여름의 맑은 오전.
옥색 치마에 흰 깔깔이 저고리를 입은 선경은 마흔 일곱 나이가 무색하리 만큼 웬일인지 가슴이 설레이고 가슴 속에서는 노랫소리가 샘처럼 들끓고 있다.
아직 사람들이 붐비기에는 이른 시간이므로 간밤의 내린 비로 말끔히 씻기운 보도에는 양지와 음지의 구별이 뚜렷한데 한 여인이 방금 머리에다 이고 와서 내려 놓은 꽃바구니 속에는 흰 안개꽃과 모란 위에 방울 소리처럼 청명한 유 월의 햇살이 눈부신다.
선경은 안개꽃과 모란을 곁들여 한 다발 사 들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꽃을 사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 꽃을 남편이 살고 있는 덕소(德소) 집 어디에다 꽂아야 할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권세연이 지금 서울을 떠나 완전히 외톨이로 상주(常住)하는 덕소 집은 그가 손수 설계하여 손수 지은 벽돌집인데 열쇠가 없는 탓으로 그가 한 달에 한 번쯤 집을 비울 때마다 고맙지 않은 손님들이 그 집안 물건들을 자주 날라 가 버려서 이제는 꽃을 꽂을 만한 항아리 하나 남아 있질 않는 실정이다.
더구나 요즈에는 술병 구경도 못할 것이니 병도 없을 것이고…
그러나 어쩌면 그동안의 커피병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내려가면 남편은 어떤 얼굴로 맞아줄까.
더구나 생판 알지도 못하는 신문 여기자를 데리고 내려간 것을 보면-
남편은 아마도 그 시꺼멓게 탄 얼굴을 노골적으로 찡그리며 아예 등을 돌린 채 입을 다물어 버릴지도 모른다.
선경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올랐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를 누르며 등을 돌리고 앉은 남편의 동그라미 굽은 등판과 흰 머리가 심심치 않게 섞인 범벅 같이 헝클어진 뒷통수가 떠올라 왔기 때문이다.
당혹과 무색함을 억누르는 여기자의 얼굴도 떠올라 온다.
전화를 통해 들은 그녀의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기껏 스물 다섯을 넘기지 않았을 유승애는 남편의 그런 태도에 싫도록 수모감을 느끼며 새파래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는선경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다.
남편이 3년이라는 칩거생활 끝에 지난달에 연 전람회는 뜻밖의 성황과 절찬을 받았다. 야심만만한 대작이 없다는 게 한 가닥 아쉬움이라는 세평도 있긴 한 모양이지만 도대체 남편의 성미로는 일반이 기대하는 초대형의 화폭을 창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토록 단조로운 선으로서만 이룩되는 남편의 그림 속에 실상 남편의 심혈이 어느 정도로 쏟아져 들어간 것인가를 알고 있는 선경이고 보면 그 이상의 주문을 바란다는것은 만용에 가까운 무지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남편은 녹초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기가 싫은 것이다. 더구나 입신출세 따위와는 애당초 담을 쌓고 있는 남편인지라 더구나 매스콤 관계 인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진심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신문사 여기자를 데리고 덕소까지 내려간 선경을 보면 남편은 뭐라고 할까.
요즘에는 화가들도 자기 작품을 위한 자가 선전에 골몰해야 할 시대인가 보았다.
그러나 남편은 어떤가.
남편은 전혀 시대를 초월해서 혼자 사는 사람이다.
만일 그에게 가장으로서의 모든 책임을 맡겼다면 그의 가족들이 여지껏 살아 남을 방도를 어디에서 찾았으랴.
지금도 그 생각에 사로잡히면 선경의 등골에서는 식은 땀이 번져 오른다.
그와 결혼한 지 27년째.
27년을 그와 더불어 살아오는 동안 그녀가 겪어온 숱한 사연들….
어떻게 하면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을 것인가만을 골똘하게 생각하던 20년 동안…
그러나 나머지 7년 동안이 선경에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해탈(解脫)의 절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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