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무거운 꾸러미를 들고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선경은 오늘 아침엔 좀 낭비를 했구나 생각한다.
남편이 좋아하지도 않는 주전부리감을 이것저것 골라 잡은 것은 유승애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식성을 알 리는 없지만 젊은 여성이니 어차피 단 것 신 것 등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듯 싶었다.
신문 기자라는 직책 때문에 공연히 경원해 오던 유승애가 개인문제로 덕소에 있는 남편을 만나겠다는 선경으로서는 그녀를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얼핏 듣기에는 맑고 명랑한 듯이 들리는 유승애의 목소리에는 기실 갈피를 잡지 못해 허덕이는 자의 초조, 목마른 자의 조바심 등이 깃들여 있었다고 뒤늦게 전화를 끊고서야 생각에 잠긴 선경은 그런 느낌이 부디 부질없는 노파심이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오늘은 유승애를 만나 위로하는 역할이 돌아올 것만 같아 이것저것 골라 담은 것이다.
유승애와 만날 시간이 촉박해 있었으므로 택시를 탔다.
차창으로 밀려 닥치는 초여름 바람이 선경의 무릎 위에 얹힌 가녀린 안개꽃 잎을 세차게 훔친다.
초주검으로 할딱거리는 꽃잎이 애처러워 선경은 반쯤 열려 있던 차창을 힘껏 올렸다.
밀폐된 공간은 감감했다.
선경은 이맛전에 흩어져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가느다란 한숨을 토해 냈다.
방금 선경이가 차창을 닫지 않았다면 가녀린 안개꽃은 이미 낙화되어 바람결에 휘날려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부터였다.
유승애를 피하고 싶은 생각이 움트기 시작한 것은!
유승애는 모름지기 선경으로서는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나타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의 맏딸인 명이가
『엄마 전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 사람은 화간데 성격이나 인생관이나 꼭 우리 아버지 닮았어요. 그 사람은 순수하고 천재에 가까워요. 엄마 그분하고 결혼해도 좋을까요?』
하고 묻기라도 하는 것과 비슷한 심경이었다.
가령 명이가 남편 세연이와 꼭 닮은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면 그녀의 엄마로서 어찌 그렇게 하라고 선선히 허락할 수 있을까.
어찌 그녀가 세찬 바람결에 부딪쳐 초주검이 되는 안개꽃 같은 명이의 몰골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어찌 명이로 하여금 어린 것을 등에 업고 걸리며 친정 문전이 닳도록 드나들게 할 건가.
어찌 명이로 하여금 언제나 남편으로부터의 탈출을 해방을 꿈꾸게 할 건가 .
그러나 지금……
바람이 멎은 후 조용해진 안개꽃차럼 명이에게도 어느날 깊은 터득이 찾아온다면 어느새 남편의 드높은 정신 차원으로 치솟아 올라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얼마나 값진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것인가.
남편의 순수를 비로소 이해하며 오묘한 신의 섭리를 깨닫는 순간 온몸을 흥건히 적시는 감루(感淚) 속에서 명이는 비로소 삶의 예지를 아름답게 빛나리.
그러니 선경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관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유승애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윤흥노라는 뛰어난 개성의 소유자와 발을 맞추어 가자면 그동안의 고초가 짐작된다.
생각에 잠겨 있노라고 선경은 자칫 자기네 서점 앞을 지나칠 뻔했다.
급히 차를 세우라고 일르면서 흘깃 서점 앞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차가 서는 것을 보자 김 군이 내달려 오는데 마침 가게 앞에서 월간지를 뒤적거리던 젊은 여성과 눈길이 마주쳤다.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그녀가 유승애라는 것은 달박에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띠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슨 깊은 상념에 갇혀 있는 사람 특유의 일종 배타적이고 고고한 정신적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주인이 이렇게 늦었으니 어떡허죠』
선경은 절에까지 마중 나온 승애에게 약속 시간 오 분을 지각한 사과부터 했다.
『저도 방금 온 걸요. 뭐 많이 사셨군요. 이게 권 선생님 일주일분 식량인가요?』
회색 저지 원피스에 까만 가죽 벨트를 맨 수수한 차림이 되려 승애의 세련미를 돋보이게 한다.
전화로 상상하기는 명이보다 한두 살 더 많은 앳된 나인 줄 알았는데 스물일곱 여덟으로는 돼 보이는 성숙한 숙녀인 승애는 신문 기자다운 활달성보다는 차분한 사색적인 풍모였다.
『노상 이렇지는 않은데 오늘은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선경은 웃으며 눈 앞에 서 있는 승애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해맑은 초하의 햇볕 속에서 승애의 흰 얼굴에는 희미하게 기미가 돋아난 흔적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선경의 가슴은 공연히 뭉클해졌다.
젊은 방황의 시절, 내 얼굴은 마치 검은 나무 등거리 같았지, 하고 선경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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