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털레비전에서 가정 파괴범으로 곧 사형에 처해질 어린 사형수와 몸부림치는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의 일이다.
60년대 미국은 젊은이의 세대요 베트남 반전의 물결이 거세던 시대이었다.
젊은이가 사회의 주역이던 당시에 이룩된 문화풍속은 히피, 프리섹스, 메디테이션 등이다. 이는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현실세계는 학교의 관리 교육체계의 체계 속에서 살던 청소년이 상상=창조의 세계로 이미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순진무후한 모습을 잃고 때로 폭력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기괴한 모습으로 자기 변용을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와의 접점을 상실하고 사회에서 버려졌다. 이들에게 사건이나 범죄라는 말은 실체가 없는 낱말이요 기호였다. 사회가 붙여준 훈장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문제는 사회의 여건이 선도하지 못하고 악화일로 가속화형화 규격품 같은 유형을 이루고 말았다.
사회는 기계화되고 조직화되고 인정은 배제되었다. 울분만 쌓이고쌓여 서로가 서로를 인정치않게 되었다.
교육자를 경찰을 시청직원을 기술자를 공녀를 성직자를 심지어 부모를 형제를 인정치 않으면서 스스로는 귀하고 고고하며 이기의 극치로 온 세사을 평론한다. 어떤 공무원이 눈가림으로 부정을 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었다. 사람들은 고발로 끝내지 않는다. 스스로가 처단해야만 하는 것 같다. 그것도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을 한보기로 만사를 부정으로 몰아붙인다. 싫도록 말하고나서 쉬쉬하면서 더더욱 흥미있는 것으로 연출한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방영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쟤네들 좀 봐, 웃기고있네…』라고 시시덕거려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존경이라는 낱말이 없어졌는 것 같다. 충효정신을 외치지만『나이 먹었으면 제나이 먹었지 나는 같은 권리가 있어. 경쟁이야』 윤리도덕체계가 무너졌다.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고도 감사의 정을 느끼지못한다. 다만 노력해서 따먹었다고 할 뿐 내가 못사는 것은 세상 탓이니까. 라이벌이 아니라도 모두가 적이다. 전쟁이다. 보는대로 죽여야 내가 산다.
적자생존이다, 가진 자, 못가진 자의 응어리는 커지기만하고 지성인은 빈정대기만 한다. 세살난 아기도 가짜다, 진짜다, 불신하고 증오로 가득한 사회는 청소년에게 주위와 위화감을 극대화시켜「성난 젊은이」처럼 확신범죄를 범하게 부추기고 있다.
인류학자 헬렌 비 슈왈츠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많은 문화와 비교할 경우 서구사회의 발상이 다른 점은 조만간 성장하여 어른의 구실을 하고 공헌하기 때문에 젊은이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소년이란 순진무후함으로써 중요한 것이며 청소년이 청소년 임으로써이지 어른이 되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인습 밑에 가려지고 세계의 혼돈을 미리 앓은 우리들의 청소년에게 스스로 구심점을 찾도록 도와야 할것이다. 청소년이 청소년답게 살도록 하자. 『가장 못된 유물론자의 사상이 나를 엄습해 온다』라고 데레사 성녀는 말씀하셨다. 자신의 관리를 소홀히하지 않아야 되겠다.
십년전만 해도 한국 가톨릭인에게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했는데 오늘은 끝이 내다보이지않는 와중에 서있으며 누굴 따를까 총칼을 든 신부님을 따를까, 웅변으로 노호하는 신부님을 따를까, 마더 데레사를 따를까,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한다. 나는『주님만 꼭 잡고있으면 된다』고 말해주고싶다.
키에르케고르의 유명한「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이 생각난다. 이야기인 즉『덴마크를 순회하던 어느곡마단에서 공연중에 화재가 발생했다. 단장은 차례때문에 단원에서 명하여 이웃마을에 지원을 청하러 보냈다. 이 단원은 분장한 채로 이웃마을로 달려갔다.
때가 추수기인지라 불시가 옮아번지면 이웃마을도 위험이 많았다. 광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곡마장의 진화작업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광대의 호소를 구경꾼을 모으려는 기발한 수법으로만 생각하고 손벽을 치며 요절하였다.
광대는 기가막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였다. 제 말이 진담이고 장난도 계교도 아니며 정말 불이 붙고 있다고 아무리 애걸하며 설득하여도 허사였다. 아니 호소를 하면 할수록 웃어대기만 했고, 연극한번 그럴싸하게 잘 한다고 더욱더 흥겨워할 뿐이었다. 결국 불길은 마을에까지 번져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곡마장 마을 할 것없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우리 가톨릭인은 자기반성을 한다. 누구와도 진실과 사랑과 삶을 나눈다. 언제나 배우고 실천한다. 세상에는 무슨짓을 해서라도 진정한 말을 전하려는 무수한 광대들이 있다. 그들이 무슨말을 하려고 하는 것까지도 미리 알고 있으며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연극을 하고있다는 것도 알고있다. 그래서 웃는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의 양심을 한층더 깊이 살펴보고 착각을 하지않는 지혜를 광대와 공존의 지혜를 구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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