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애가 선경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을 배경으로 안개꽃과 모란꽃을 무심히 움켜잡은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미소 짓고 서 있었다.
금싸라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유월의 양광 탓이었는지 승애의 눈에는 선경이 일순 여린 황금빛 후광에 에워싸이는 것 같았다.
-참 아름답구나!
승애의 가슴 속에서는 한숨 섞인 쉰 목소리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승애는 반사적으로 며칠 전 학창 시절의 은사 댁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본「귀부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수석을 생각해 냈다.
『자 보아요. 이 유연하게 흐르는 선과 매끄러운 걸음! 몇백 년인지 몇천 년인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수없는 세월 동안 물과 풍상을 겪어오는 동안에 조금씩 조금씩 이런 완성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거라오. 한낱 무심한 돌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 슬기와 격조를 느끼는 게 아니겠소. 슬기와 격조 없는 여인은 귀부인이 될 수 없고 귀부인이란 결코 일조 일석에 되는 게 아니지』
은사의 말에서는 자기가 수집해 온 수석에 대한 과장된 선전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은사가 자랑하는「귀부인」이라는 이름의 수석에는 은사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충격적인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승애가 선경을 보자 퍼뜩 은사 댁에서 본 수석을 연상한 것은 우연한 노릇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 기자라는 직책상 승애는 각층 각계의 인사들을 꽤 알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문화부의 여성란을 맡고 있는 승애가 아는 저명하고도 우수한 여성의 얼굴은 결코 적지가 않다.
그 가운데에는 박사도 있으며 국회의원도 있고 교수ㆍ교사ㆍ작가ㆍ시인ㆍ화가 디자이너ㆍ여성운동가ㆍ사회사업가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인간들의 흉수 속에서 멀미를 일으키고 있다고나 할까 감동에 대한 불감증을 앓고 있다고나 할까 승애에게는 도무지 이렇다할 감격이 없는 그 얼굴들이었던 것이다.
선경은 별로 이렇다 하게 빼어난 이목구비도 아니었으나 엷은 화장 밑에 드러나는 살결의 맑음이며 인조 연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입술의 붉음이며 파마기 없이 틀어올린 머리며 하나 같이 정결하고 품격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승애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리라.
-동화 같은 그림을 그리는 권세연 씨 부인이기에 그의 동심의 경지를 더불어 호흡하는 때문이리라-.
승애는 선경이 태워주는 대로 차에 오르는 동안에도 줄곧 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권세연과 윤흥노의 차이는 그들의 여인들에게서도 이렇듯이 뚜렷한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천진한 동심의 세계로 승화하는 권세연의 부인은 저렇듯이 선경(仙境)의 분위기를 속계(俗界)에 향기처럼 풍기는 한 떨기 연꽃이라면 나는…하고 승애는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이었다.
윤흥노! 그는 스승 권세연과는 판이한 작품 세계를 이룩하며 마치 이 세상의 광기를 혼자 도맡은 것처럼 강렬한 색채의 뒤범벅 속에서 나를 미치게 한다.
승애는 갑자기 숨이 차 올랐다.
『사모님!』
충동적으로 선경을 불렀는데 그것은 승애로서가 아니라 권세연의 제자인 윤흥노의 약혼자로서였다.
『사모님께서는 권 선생님과 결혼하신 걸 후회하신 적이 없으시죠?』
승애의 말 속에는 지금 나는 윤흥노와 약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암시가 있다고 선경은 생각했다.
승애의 기미 낀 얼굴은 그녀의 마음 속의 암투가 얼마나 치열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표적이 아닌가.
선경은 잠시 안정을 잃고 있는 승애의 눈 속을 차분히 건너다 보았다.
선경은 말 대신 승애의 가즈런한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열이 있는지 뜨끈한 승애의 손을 허우적거리던 자신의 과거를 더듬는 것처럼 짐짓 감개무량하게 쓸어내려 주었다.
『동생 같은 분이니 승애 씨라 이름을 불러도 괜찮겠죠? 나더러 권 선생과의 결혼생활을 후회한 적이 없었느냐고 물었지요? 승애 씨는 놀라겠지만 나는 권 선생과 결혼한 첫날부터 20년 동안을 후회 안 한 적이 하루도 없었답니다』
『녜?』
『내 고백을 들으면 비단 승애 씨뿐 아니라 누구라도 놀랄 거예요. 지금에 와서는 그럴 것이라는 뜻이죠. 물론, 그러나 지금은 결코 후회하지를 않아요. 오히려 권 선생에게 감사를 드리는 생활이라고나 할까요』
『권 선생님이 변하신 거로군요. 이전의 술주정뱅이 권 선생님과 지금의 권 선생님은 사람이 달라진 것 같다고 누구나 입을 모으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죄다 사모님 덕분이라고 저희는 모두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승애 씨, 그런 것 같죠? 나도 그런 소리를 여러 번 들었어요. 그렇지만 사실은 정반대예요. 우리 사이에서 변한 것은 권 선생이아니라 나예요. 딴 분들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승애 씨한테 죄다 털어놓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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