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마르틴 루터를 비롯해서 여러 이단자들이 속출해서 세상을 어지럽힌 동시에 교회 내부에서도 사이비 성직자 나쁜 수도자들이 있어 주님에게 계속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의 벗인 데레사는 주님의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감싸드리기 위해 완전한 기도와 고행의 수도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이「아빌라」에 성요셉 수녀원을 세우게 했다.
이것은「개혁 까르멜회」의 최초의 수녀원이었다.
성요셉 수녀원은 마치 거대한 거목이 될 조그마한 겨자씨와 같은 것이었다. 무수한 반대자와 음모와 중상 그 밖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반대와 역경에 부딪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소명을 조금도 양보하거나 굽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안정된 기도생활을 좋아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그녀를 그러한 생활 속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약한 몸을 이끌고 갖은 고초를 다 겪어가며 항상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날의 일이었다. 심한 다리의 통증으로 인해 나귀를 타고 여행하다가 나귀가 개울물에 미끄러져 개울물에 빠졌다. 그녀는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하느님께 말했다.
『주여, 이제까지 무수한 고통을 겪은 후에 이렇게 다리에 아픔을 주고도 이러한 대접을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데레사! 나는 내가 사랑하는 벗에게 그러한 대접을 하지요』
데레사는 다시 솔직한 신뢰로써 사랑과 감동에 찬 대답을 했다.
『오, 주여! 그래서 당신에게는 그렇게도 참다운 벗이 적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군요』
조금의 휴식도 없으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이 개혁자는 완전히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시련과 고통, 그리고 모략과 중상을 당할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보다 더 절감하면서 그 사랑으로 해서 용기백배하여 불굴의 의지로써 주님의 일을 추진해 갔다.
이와 같이 주님의 요구를 알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진정한 개혁자로서 그 당시의 타락한 온갖 풍습에 대립하여 병약하지만 강철과 같은 의지로 15년 동안 쉴새없이 일했다. 그 고난의 도상에서 그녀는 분발과 아픔이 뒤섞인 절규를「영혼의 성」그리고 아가(雅歌)에 대한 소품「계율(戒律)」「창립자(創立者)」등 유명한 책을 후세의 우리를 위해 남겨 놓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맨발의 까르멜 남자 수도원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데레사가 십자가의 성 요한을 만난 것은 53세 때의 일이었다. 요한의 나이는 26세, 어머니와 아들과 같은 이 두 신비가의 상봉은 주님의 섭리에 의해 또 하나의 위대한 일을 성취시키게 했던 것이다. 다시 데레사는 필립보 2세와 당시의 스페인의 권력자들에게 편지로써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알카라」의 수도회의(수도회의)에서 그녀의 개혁을 완전히 인정 받아 개혁 까르멜의 수녀회는 이제야 아무런 저항도 없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582년 10월 4일 67세에 이르른 주님의 데레사는「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그의 생애를 마쳤다. 그녀는 자신의 임종을 기쁨으로써 맞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나는 내가 사랑하는 분, 내 주님이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시기가 왔어요』그녀의 얼굴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미소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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