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권세연 씨와 결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막바지에 오르는 1944년의 일이었어요.
나의 친정 아버님은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훌륭한 교육정신을 가지신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셨어요.
나는 아버님의 무남독녀였는데 여고를 나온 결혼 적령기의 처녀가 되자 주위에서 빗발치듯 한 혼담을 물리치고 권세연 청년을 택한 것은 그를 나에게 천거하신 분이 바로 내 친정 아버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내 친정 아버님께 인간적인 신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학병을 피해서 도망치듯 일본에서 고향으로 나온 권 청년과 첫 대면을 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별로 이렇다할 감회가 없었어요.
그는 무던히도 과묵한 사람이더군요. 그러나 그가 이따금씩 숙이고 있던 고개를 추켜들며 웃을 때는 아무런 사심(邪心) 없는 어린이 같은 청결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즈음 내 결혼 상대자로는 권 청년 말고 우리 친정 어머님께서 적극 추천하시는 호걸풍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이분은 지금 누구라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유명한 정치가로 대성한 분이지요. 이분의 이름을 편의상 A라고 한다면 A에 대한 우리 집안의 반응은 사뭇 열광적인 무엇이 있었어요.
A는 쾌활하고 건강하며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서는 다소의 권모술수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무남독녀를 맡기는 사위감으로는 다시 없는 자리라고 이름을 모았던 거에요.
사실, 인물만 가지고도 A는 권 청년을 능가하고도 남을 누구의 눈에나 선뜻 드는 훤하게 잘 생긴 사람이었지요.
A에 비한다면 권 청년은 그야말로 빈약하고 보잘것 없는 체구에다 자세히 뜯어보면 과히 못 생기지는 않았지만 때깔 벗지 못한 살결 때문인지 사람의 눈에 띨 수는 도저히 없는 그런 대조적인 면모의 주인공이 아니었겠어요.
그러나 나는 두 번 맞선이라는 걸 본 다음 권 청년 쪽을 택하게 된 거랍니다.
그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첫째는 친정 아버님이 골라주신 인물이라면 틀림이 없으리라는 생각에다 두 번째 생각은 A에게서 느껴지는 지나친 자신감(自信感)이 그를 어쩐지 세속적인 야망가로 느끼게 했던 때문인가 봐요.
또 하나 큰 이유는 이건 나의 여성적 이기주의가 시키는 일이었지만 나는 우리집 고모님의 생애를 곁에서 이따금씩 살펴 보는 가운데 얻은 결론이란 지나치게 자기 확장욕이 강한 남성, 말하자면 야망이 큰 남성들 그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여자의 행복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내 고모부는 쟁쟁한 유력자로 안팎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사회적 인물이었지만 그 그늘에 사는 고모님은 언제나 남편을 공사(公事)에 빼앗긴 채 독수공방을 지새는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게는 어느새 행복한 여인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유명 인사의 아내가 되지 말자는 철칙이 굳어져 있었던 거에요.
A를 뿌리치고 권 청년을 택했던 때 주위의 반응은 마치 밤낮이 뒤바뀐 듯이 요란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어머님께서는『받은 밥상 걷어차고 쪽박 차게 됐다』며 앓아 눕기까지 하셨지요.
이 때문에 우리 혼담은 잠시 주춤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A는 끈질긴 만회전으로 박력 있게 역습해 오는데 반해 권 청년은 마치 그 따위 세사(世事)는 오불관언이라는 초연한 태도를 보일 뿐이 아니겠어요.
여자의 심리란 참 묘한 것인가 봐요. 이쪽에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이면 보일수록 호기심이 당기고 마치 그를 세속을 초월한 초인이나 되는 듯이 흠모하는 마음마저 생기는 것이니 말이에요.
혼담이 시지부지 연기되는 동안 A의 끈질긴 공세를 받으면 받을수록 문안 인사 하나 보내지 않고 묵살의 태도를 보이는 권 청년에게 나는 신기하게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아무리 구중심처에 고이 감추어진 여자라도 한 번 가슴에 불길을 담게 되면 높은 담을 뛰어넘는 파랑새로 되고 노란 나빈들 못 되겠어요?
어느 맑게 개인 그렇군요. 꼭 오늘날은 유 월이었던 것 같아요. 나무의 신록을 보니 그때의 광경이 눈 앞에 선하게 되살아나는군요.
나는 약혼설이 오갔던 청년을 찾아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간신히 찾아낸 것은 어느 조그만 산골의 암자였습니다. 그는 숨어서 스케치하는 데만 골몰하는 것 같았습니다.
햇볕이 폭포수의 포말처럼 튕겨나고 있는 신록을 헤치며 수염이 부수수한 그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순간 나는 나와 그의 인연의 끈이 멀리 전생으로부터 전해지며 이어져 온 것 같은 어떤 전율 앞에 몸을 떨었습니다. 나는 과감하게도 결혼 재신청을 한 셈일까요?
그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팔짱을 낀 채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잠시 후 입을 연 그는 그동안 줄곧 내 생각을 했었다는 것, 사실은 내가 그를 모르는 8년 전부터-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린 소녀 때부터 나를 좋아하고 사랑했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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