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제자들을 뽑아 협력자로 정하신 다음 그들과 함께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들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이 하늘나라의 전도여행은 아마도 가파르나움을 기점으로 시작하셨다. 『그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안식일이 되자 즉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라고 마르꼬는 전하고 있다.
전교활동의 주무대로 되어있는 갈릴래아는 이교도들의 나라 즉 온 세상을 상징하며 전도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였다. 이것은 복음서를 쓰고 있는 제자들이 사도시대의 초생교회가 옛 조상들의 성도 예루살렘을 떠나 온 세상을 퍼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활동상이 바로 예수의 전도여행의 연장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전도생활은 두 가지, 하나는 가르침이고 또 하나는 고침이다. 이 거룩한 일들을 예수께서는 우선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셨다. 안식일과 회당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안식일은 하느님이 창조하는 일을 하시고 쉬신 날을 지키는 것이며(출애20, 11: 31, 17) 그 실천은 하느님이 백성이 에집트 유폐에서 탈출한 후부터이다(신명5, 15).
이 날은 인간생활을 위하여 활동하는 세속적인 엿새와 따로 떼어 하느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날로 지내는 것으로 거룩하게 지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을 쉬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일이었다. 이 날은 회당에서 성경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 외에는 일체의 노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경건한 유대아인은 안식일에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자기방위를 하느님보다 원수의 손에 죽는 것을 택하였다(Ⅰ마카2, 32 이하).
안식을 지키는 일로 예수님은 유대아의 지도자들과 불편한 관계에 빠져들게 되지만 복음사가들이 복음서를 쓰던 때에는 사도들도 처음에는 안식일 즉 제7일(오늘의 주일이 제1일이다) 토요일에 회당에서 설교하다가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당하면서 안식일수계를 주님이 부활하신 날(안식일 다음날)、성령을 받은 날(안식일 다음날)로 정하여 이날을 즐겁고 기쁜 날로 지내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주님의 날」즉 주일로 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사도들은 회당에 모이지 않고 「신자들의 집」에 모였었다. 이것이 성당이다. 이 집에서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신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목숨 바쳐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듯이 회당에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놀라마지 않았다. 그 가르치는 품이 권위가 있었고 율법학자들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떤 내용의 말씀을 하셨기에 사람들이 놀랐으며 또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가르쳤었는가. 유대아국민의 생활은 율법으로 경직되어있었다. 하루 24시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으로 통제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율법의 주인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등에 업고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하는 율법학자들의 전통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기들의 가르침이 선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반복하는데 있었고 자기들의 해석이 전통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야만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전해 받은 것 외에는 다르게 가르칠 권한이 없었다. 민중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 것에 그들은 놀랐다.
그 권위는 그리스원문의 뜻에 따르면 「위임 받은 권한」이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받은 교도권이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마르꼬와 루가는 가르침의 내용을 뒤로 미루는 순서를 사용하였지만 마태오는 먼저 그 가르침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 가르침의 내용이 새롭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사람들은 그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고 순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사랑의 법」이었고、하느님나라의 생활내용이었다.
산상교훈에서 내린 진복팔단의 훈시、살인금지법을 넘어서 남을 해치는 일、성내는 일까지 하지 말 것、간음에 관한 교훈、이혼에 관한 새 법、맹세、복수 등에 관한 윤리는 이제부터 한층 더 신성한 차원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한다. 한 마디로 사랑의 법은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비는「주의 기도」에서 요약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으로 새로운 교설이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위임받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교설의 교도권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이 권위를 감지하였고 또 놀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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