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견된「빠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1902년부터 20년간 한국 가톨릭의 내외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한「조선교구 통신문」은 한국 교회사연구에 새 사료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이에 본보는 그 발견 공개자인 최석우 신부의 해설을 연재키로 한다. <편집자 註>
1902년, 그때만 해도 아직 한국 천주교회에는 교구도 하나 주교도 한 분밖에 없던 시대이다. 교구는「조선교구」라고 불리웠고 교구장은 뮈텔 (민) 주교였다. 이 교구는 아직「빠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교구장도 당연히 외방전교회 소속 회원이었다.
당시의 교우 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연말 보고에는 신자 총수가 5만2천 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대인 영세자 5천8백 명이 이 숫자에 들어 있다고 하니 1년 간의 영세자는 신자수의 1할을 넘는 실로 놀라운 전교 성과였다.
그것은 동시에 빠리외방전교회가 맡아보는 전교지방 중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개종률이었다. 신자 수의 1할의 영세자를 낸 것은 비로소 그 해에 시작된 일은 결코 아니었으며 이미 수 년 이래 지속되는 현상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현상이 전국적인 경향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높은 개종률을 보인 지방은 황해도였다.
불과 7천 명을 헤아리던 황해도가 한 해 사이에 무려 2천3백 명 (약 33%)의 새 신자를 배출시킨 것이다.
분명히 한국 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발전의 이면에는 아직도 고난의 검은 구름이 교회를 덮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는 성가신 사건들이 그칠 줄을 몰랐다. 지방 교우들은 관리나 외인들로부터 침범되고 학대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그 대표적인 예로 바로 1년 전에 일어난「제주도 교인 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흔히 속되고 불순한 요인들이 섞여 있었다. 가령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 지방 관리들의 탐욕 교우들의 경거망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교회의 과실과는 전혀 관계 없이 오로지 신앙을 증오한 결과에서 나온 박해라고 단정하기란 어려웠다.
여하튼 제주도에 이어 바로 이웃에서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사건은 이번에도 다름아닌 납세와 관련하여 발단한다. 지도군의 세리들이 자은도의 교우들에게 고액의 부당한 세금을 요구하자 세리와 교우들 사이에 폭행과 구타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충돌로 인하여 무안본당의 데세헤 (조) 신부가 부상을 당하고 자은성의 교우들이 많은 피해를 일었다. 교회의 항의로 사건의 결말은 재판소가 판가름하게 되었다.
이상 소위 지도사건 외에도 이 해에 특기할 만한 것이라면 몇 개의 성당이 신축된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구 계산동성당이 길고도 어려운 공사 끝에 마침내 준공되어 대구본당 로베르(김) 신부가 대림 첫 주일에 새 성당에서 첫 미사를 올렸다. 또한 용산신학교 성당이 장엄한 예식으로 축성되고 수원 가뜽이 성당도 이 해에 낙성되었다. 부산에서는 몇 해 전에 겨우 매입할 수 있었던 대지에 성당 건축을 추진하려 할 때 대지가 철도 용지로 분할됨으로써 다시금 애로에 들어섰으며 사건은 보상금 시비로 확대되었다.
한편 나라에서는 황제의 등극 40년을 맞이할 축제 준비에 바빴다. 교황 레오 13세도 축하의 친서를 보내왔다.
그러나 축제 준비가 한창일 때 뜻 밖의 재난이 전국을 휩쓸게 되니 축제는 연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난이란 바로 콜레라의 창궐이었다. 호열사 또는 괴질이라고 불리던 이 병은 그해 일본에서 들어와 시초엔 일본인 사이에 전염되더니 곧 전국적으로 퍼져 1개월 동안 그 맹위를 떨치게되었다. 막 15번째 장례를 치루었다는 진남포의 포리 (방) 신부는『만일 이대로 괴질이 계속한다면 미구에 진남포엔 교우가 한 명도 남지 않을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참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인천에서도 성 바오로 교회의 한 젊은 수련수녀가 이 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희생자가 생긴 곳은 역시 서울이었고 불과 10여일 사이에 1천여 명이 콜레라로 죽어나갔다.
무엇보다도 부산교회는 이 재난에서 가장 큰 불행을 겪어야 했으니 목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부산은 일본과 인접해 있는 과제로 제일 먼저 콜레라에 전염되었고 교우 희생자만도 10명을 넘었다. 그때 부산에는 로 (노) 신부가 본당 신부로 있었다. 그는 마침 대구에 갈 일도 있었지만 위험에 처한 양들을 혼자 버려둘 수가 없어서 그들 곁에 남아 있기로 했다. 9월 13일 마침내 천주님은 그의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셨으니 그때에 그의 나이 53세였다. 9월 22일자 교구일지는 대구 로베르 신부가 보낸 소식이라고 하면서 노 신부의 병세와 그의 최후 순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이렇게 남겨 놓았다.
9월 10일 저녁 교우 10명에게 종부성사를 주고 난 노 신부는 기분이 좋지가 않아서 미국인 의사를 찾아가 콜레라 예방주사를 맞고 돌아와서 교우들에게도 다 맞으라고 지시했다. 심한 설사와 복통이 일어나므로 그는 약을 들었고 그래서 좀 나았다. 다음날 그는 정원에서 산보를 하고 내게 편지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미국인 의사가 달려와서 여러 가지 치료를 했다. 또 환자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모르핀 주사를 놓아 주었다. 의사를 돌려보내고 나서 그는 두 회장을 불러 그들에게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겼다.『이제 귀도 안 들리고 혀도 굳어졌으니 나는 곧 죽을 것입니다.
고백성사와 종부성사를 받지 못한 것이 후회일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내가 그들을 때로 까다롭게 대하여 고통을 주었다면 그것은 다만 그들의 영혼을 위한 때문이었습니다. 또 내가 교우들에게 고통을 준 일이 있다면 이제 용서를 청합니다. 나로서는 그들을 용서해야 할 일이 있다면 모두 용서합니다. 이렇게 교우들에게 전해 주십시오』아침 6시 다섯 번이나 경련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그는 그의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신부 사망의 소식에 접한 일본 영사는 일본 경찰을 시켜 관을 보내오고 또 현명한 조처라고 하면서 신부의 시체를 불 태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교우들은 강력히 반대하였고 신부의 시체를 엄중히 감시했다. 8월 15일 강 노렌죠 신부가 와서 즉시 노 신부와 남 가롤로 회장의 장례를 치뤘다. 그런데 남 회장은 신부의 병 간호를 하던 중 자신도 전염되어 신부가 선종한 다음날 그도 사망했다. 이렇게 콜레라의 재난 가운데 목자는 양을 위해서 양은 목자를 위해서 서로가 아낌없이 생명을 바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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