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오셨지요?』
나는 거푸 묻지 않을 수 없어요.
『어디서 왔느냐 묻기 전에 어서 돈이나 내놓으슈』
여인은 핸드백 속에서 손때가 자글자글 묻은 수첩을 꺼내더니 내 앞에 던졌습니다.
『사시장철 외상이더니 외상값도 갚지 않으시고 덮어놓고 집으로만 가라시니 염체 불구하고 찾아온 거예요. 나 원 집 찾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래 얼마나 드리면 되나요?』
술값 외상쯤이야 밖에서 손수 해결해도 될 것을 하는 민망스런 생각도 곁들여 나는 손때 묻은 수첩을 들춰볼 생각이 없었던 거죠.
『아주머닌 그 양반이 어떻게 술 잡수시는 줄 모르시죠? 혼자선 절대로 안 오신답니다.
으레 꽁지를 달고 오셔서는 절대로 남의 술 얻어 자시지도 않습니다. 나는 명색이 술장수지만 그 양반 같은 술꾼을 본 적이 없어요』
술집 여자는 결국 술값이 너무 많다는 변명을 늘어놓은 셈이지요.
외상값을 물고 나니 에누리 없이 월급 봉투는 깨끗이 비어버리고 오히려 낱전 몇 푼이 부족한 형편이더군요.
술집 여자가 오히려 송구해하면서 생활비를 얼마간 남기고 가겠다는 걸 내가 우겨서 그대로 주어 버렸지요.
다시는 외상을 지지 않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한밤중이 되어 또 다시 곤드레가 되어 들어온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나무둥걸이처럼 쓰러져 버리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아침엔 아침대로 취생몽사의 몽롱한 상태에서 가까스로 몸을 추스려 나가는 그에게 또 다시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는 우리가 무엇으로 먹고사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같았어요.
일이 다급할 때마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친정집에서도 이제는 대를 이을 양자를 삼았으니 전처럼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나는 자연히 빚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으로 갚는단 말입니까.
나는 날만 새고 눈만 뜨면 돈, 돈, 돈이었어요.
내가 돈 때문에 노심초사가 되면 될수록 남편의 주량은 정비례로 늘어만 갔습니다.
마누라의 푸념이 듣기 싫어서 술로 잊겠다는 뜻인 모양입니다.
원래 그가 왜 그토록 술에 취해야만 됐느냐를 생각하면 그 실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그가 마음대로 그림에 전념할 수가 없는데서 그의 술은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마음대로 그림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첫째가 정치적인 요인입니다.
정치가 나빠서 사회가 이 꼴이고 사회가 이 꼴이니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그런 것에 대한 비분강개로 술을 들이켰는데 거기다 생활이라는 것, 마누라, 자식, 그런 것들이 그의 어깨를 꽉 누르고 숨통을 조여버린 것이지요.
그림을 위해서 온갖 정열을 불태우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요인들이 너무 많아서 술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어느날 우연히 그가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옆에서 있었습니다.
내 머리 속에서는 이달에 물어야할 이자, 아이들의 밀린 학비, 떨어진 식량 등의 생각으로 온통 뒤범벅이 되어 있었어요.
그는 캔버스 앞에 서면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엄격해지고 한 치의 용서도 없는 가혹한 사람이 됩니다. 진지한 빛을 이글이글 태우면서 캔버스를 노려보는 모습은 아름답다고나 할까, 무섭다고나 할까, 하여간 내 마음을 여지껏 그에게서 떼지 못하게 하는 인력이 있었다면 오직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 겁니다.
캔버스 앞에서는 완전한 무아의 경지로 몰려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그의 작업은 생각하는 대로 척척 진척되지가 않는 모양입니다.
초조한 듯이 아낌없이 칠했던 유화구를 버벅 지워내는 게 아닙니까. 그 값비싼 것은 내 눈에는 그것의 한 방울이 마치 내 피의 한 방울처럼 느껴지는 유화구! 저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식구의 몇 달치의 생활비를 희생해야 했는가. 저것을 사기 위해 나는 또 다시 빚을 졌고 남편의 술값을 물어야 했는가.
돈 돈 돈…
저것의 한 방울이 곧 내 피를 말리는 돈 그 자체가 아닌가 아까워라! 얼마나 아까울까!
『여보! 좀 아껴서 쓰세요. 그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아시잖아요』
난 그렇게 무서운 남편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한 소리가 그렇게도 못된 소리였을까. 나는 그의 미친 듯한 손지검 발지검을 받으면서도 그 순간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기만 했습니다. 나는 내 혀를 물고 죽을 생각이었지요. 내가 한 말을 후회해서가 아닙니다.
그 핏방울처럼 아까운 것을 아껴서 쓰라는 조심스런 한 마디 때문에 내가 부당히 당하고 있는 이 용서할 수 없는 수모 때문이었죠.
그때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것은 울면서 달려드는 어린 아이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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