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事多魔」란 말이 있다. 이 말이 은총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즉『하느님이 하시는 좋은 일에는 반드시 그것을 질투하는 마귀의 장난도 심한 법이다』그런 뜻에서 우리는 이 말을 이 시대의 황해도에 적용해도 무방할 것 같다. 황해도는 4년 전만 해도 독립된 전교 시방에 들지 못하였고 평안도와 함께 한 지역 구실을 했을 뿐이었으며 교우 수만 보더라도 두 지방을 합쳐야 겨우 1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4년이 지난 1903년에는 전교신부의 수만도 4명, 교우 수는 7천 명을 훨씬 넘었으며 무엇보다도 일로上昇하는 영세 입교자의 수에 있어서는 수 년 이래 계속 전국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호사다마」란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개종이 집단적인 곳에 혼란도 집단적이 될 위험성은 많은 것이다.
과연 수 년 이래의 황해도의 혼란은 해를 거듭할수록 일층 확대되고 악화됨으로써 금년에 와서는 어쨌든 양단 간의 해결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혼란의 시초는 교우와 외인 사이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 그들 배후의 세력들이 여기에 가담하게 되었다. 교우들과 충돌하는 외인들 중에는 소위 보부상들이 많았다. 그들은 말하자면 단순한 행상인으로서, 보기엔 대단한 것 같지 않았으나 실은 하나의 단체로 뭉친 그들의 세력이란 당시 무시 못할 사회 세력으로 나타났었다. 뿐더러 그들은 지방 관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때로는 그들의 지시하에 움직이기까지 했다.
한편 교우들 뒤에는 소위 양대인이라 불리던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세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우와 외인 사이의 사사로운 싸움은 결국 지방 관리와 서양 신부 사이의 큰 싸움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여기서 프로테스탄이 가담하게 되자 사태는 일층 미묘해졌다. 지방 관리들은 본시 가톨릭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프로테스탄을 쉽게 그네들 편으로 끌어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록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의 중재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태가 가톨릭에 유리하기란 어려웠다.
이제 우선「교구통신」이 보도하는 몇 가지 사건을 소개한 다음 그 원인과 결과를 찾아볼까 한다.
3월 7일ㆍ지난해 6월 말 박정모란 자가 황주의 한 신부 댁을 습격했다. 그래서 홍석구(Wilhelm) 신부가 관가에 고발했다. 그러나 관찰사는 도리어 유교를 칭찬하고 천주교를 멸시하는 동시에 천주교도를 반역자로 간주하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교우들을 체포케 했다. 11월에는 신무포의 프로테스탄들이 천주교 신자들이 공소를 짓는다고 하면서 그들을 때리고 돈을 뺏아갔다고 교우들을 관청에 고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재녕의 곽(Le Gac) 신부는 공소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홍 신부가 목사에게 회담을 제기했으나 목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뿐더러 프로테스탄은 교우들을 관찰사에게까지 고소했다. 가톨릭을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관찰사는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프로테스탄을 선동하여 가톨릭과 싸우게 했다. 그리고 순검을 보내어 교우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무포의 소송이 기각되자 관찰사는 같은 모험을 장연 군수는 추가 세납을 징수하는 데 부정이 있었다고 서울에 고발되었고 그 결과 그는 부정한 액수를 희생자들에게 반환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던 중이다. 그런데 주요한 희생자 중에 교우 한 명이 끼어 있었는데 그는 끝까지 그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건의 주범자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해마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 주범은 프로테스탄이었다. 그래서 관찰사는 이 사건에도 간섭하게 되었고 도리어 교우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이에 홍 신부가 관찰사에게 항의서를 제출했으나 관찰사는 그 편지를 열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본인에게 돌려보내는 한편 선교사와 교우들의 행실을 신랄하게 서울에다 고발하면서 홍과 정 두 신부의 소환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사 책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 특사로 하여금 해주 신천 장연 세 지방 천주교인들의 모든 소송을 조사케 하였다. 또한 교회 측의 丁(Doucet) 신부를 동행케 하여 이 재판에 배석하게 하였다.
정부는 사책사의 일방적인 보고에 의거하여 황해도에 갇혀 있는 모든 교우들을 서울로 불러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쁠랑시 프랑스 공사는 이 같은 처사가 불공평한 것이라고 항의하면서 전 관찰사 이용직 상무사 두령 박정모해주관찰부 주사 안세영이도 홍 신부에 대한 중상과 교우들에 대한 폭력 때문에 마땅히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공사는 일의 조속한 해결만을 바라고 있었던 탓일까. 결국『경중을 가려 의법대로 빨리 판결하겠습니다』라는 정부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데 그쳤다.
이상 사건은 소위「해서교민사건」이란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며 특히 신교 측 역사가들의 공격과 비난을 받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물론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다 시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교회 측의 잘못이 없지 않았음을 솔직히 시인해야 할 줄로 믿는다. 그것은 교우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때로 선교사의 행동이 좀 지나쳤고 교우들은 선교사의 힘을 믿고 때로 경거망동한 데 그 원인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선교사들이 지방 관리에 대하여 신중을 기할 것과 교우들은 외교인과의 관계에서 신중하도록 당부한 교구통신의 통첩은 그간 선교사와 교우들의 이러한 탈선행위가 없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홍 신부를 서울로 소환한 것도 순전히 관찰사의 요구에 양보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회 스스로가 판단한 필요에서인 듯하다. 민 주교가『관찰사에게 항의하는 것이 불행히도 당신에게는 원칙이 되어버렸습니다』고 홍 신부를 책망한 데서 소환 이유가 오직 당국의 요구만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해도 지방의 놀라운 성공과 시련이 근본적으로는 보다 깊고도 같은 원인에서 기인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정부패가 판치는 사회에서 백성들이 살아가려면 관리의 탐욕에서 보호해 주는 어떤 힘이 아쉬웠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부상 같은 조합에 가담한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것도 실은 관리들이 선교사들 앞에서는 마음대로 행동을 못한 때문이다. 반면 관리들은 그들의 자유를 구속하여 탐욕을 억제하는 선교사들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항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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