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주량은 더 많아지고 이제는 주정까지 곁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내외는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편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에 미움을 담기 시작하자 내 얼굴에는 거뭇거뭇한 반점이 돋아나기 시작하더군요.
그것은 점점 색깔이 짙어가더니 온 얼굴에 덮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남편의 직장은 대학으로 바뀌고 이따금씩 완성되는 그림은 독특한 화풍으로 화단의 주목을 끌더군요.
그에게는 숭상하는 선배가 없는 반면 진심으로 그의 화통을 사모하며 모여오는 후배는 꽤 많은 편입니다.
윤흥노씨는 그 중의 한 분입니다만 그이들이 술을 마시는 좌석에 우연히 맞닥뜨린 때가 있었어요.
나는 남편의 외상값을 갚으려고 그들의 단골 술집에 들렀던 것인데 아직 저녁도 되기 전인 그곳에 이미 권세연씨를 중심으로 한창 주석이 무르익고 있었어요. 게다가 나는 정말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마침 기성대갈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권세연씨는 신고 있던 고무신을<참 권세연씨의 고무신에 유명한 얘기라는 건 승애 씨도 잘 알겠네요. 그이는 고무신만큼 편한 신발이 없다 하여 학교에 나갈 때도 언제나 고무신만을 신음으로써 얼마나 내 불만을 샀는지 몰라요.
고무신만 가지고 얘기를 하더라도 숱한 사연이 있을 정도니까요) 하여간 그 고무신을 말이에요. 갑자기 훌떡 벗더니 거기에다 막거리를 철철 넘치도록 따라가지고는 제자 후배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벌컥벌컥 들이키는 게 아닙니까.
목불인견의 광경을 목도한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발 밑에 뿌리가 내린 듯이 발이 움직여지지가 않는 거에요.
나는 그만 어느 제자 한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나는 강제로 그들의 술자리에 끌려갔으나 남편의 모습을 정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남편을 외면한 채 제자들의 인사에 마지못해 응수할 밖에.
그런데 그 가운데 누가 갑자기 나를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술 기운을 빌려서 한 마디 말씀드리는 건데요, 사모님은 도대체 틀려먹었어요…』
그러자 그들은 벌집 쑤셔놓듯 일제히 나에게 포격을 가하는 게 아닙니까.
『사모님은 어째서 우리 선생님을 냉대하십니까?』
『1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의 아내가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아셔야 됩니다』
『선생님이 왜 그림을 못 그리시는 줄 아십니까? 사모님 때문이에요. 사모님이 선생님 그림을 못 그리시게 방해하신단 말씀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을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시는 겁니까?』
그 이상 더 기억할 수는 없어요. 아무튼 그들의 원성은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고도 남았어요.
나는 그가 돌보지 않는 가계를 꾸려가기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데 그들의 입으로 여지껏 상상도 하지 못한 가시 돋힌 힐난을 당하고 보니 끝이 뾰족한 창 끝으로 마구 찔리움을 당한 것처럼 혹독한 아픔 속에서 오로지 망연자실, 어안이 벙벙한 채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속에서 오로지 내 편이 되어 나를 감싸준 것은 험상궂게 생긴 술집 마담뿐이었어요.
『학생들 생각은 모두 틀려먹었오. 나 보기에는 권 선생 사모님 같은 분이 없어요. 누가 매달매달 남편의 외상 술값을 갚느라고 한 달치 봉투를 툭툭 터는 사람이 있겠오? 이 양반들은 붕어 새끼라서 맹물만 먹고 산답니까? 내 팔자가 기구해서 이렇게 술집은 채리고 있지만 권 선생 같은 술꾼도 처음 봤으며 그 사모님 같은 부인도 첨 봤어요. 어떤 때는 이 어른 월급 봉투를 톡톡 다 털 때마다 내 양심이 쑤실 지경이라오』
술집 여자가 막걸리에 절은 듯한 걸걸한 음성으로 나를 그렇게나마 비호해 주지 않았던들 그들의 공세는 한층 신랄했을 거예요.
나는 비틀거리는 남편을 부축하고 한밤중에야 술집에서 나올 수가 있었지요.
통금이 가까운 시각이기에 내 마음은 콩 튀듯이 초조했지만 이 분은 파출소 앞을 지날 때마다 삿대질로 들이대며 백성의 고혈을 빨아 먹는 도둑놈들 나오라고 고함을 지르고 행패를 부리니 어떡하면 좋지요. 글쎄.
미움으로 뻐개질 것 같은 사람을 부축해 오느라고 내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은데다 주정꾼과 함께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하는 통에 묻은 흙과 먼지로 그야말로 지옥불을 헤치고 나온 여자의 몰골이었지요.
간신히 새벽 한 시가 가까워 집에 당도하고서는 그가 땅바닥에 나뒹굴건 말건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목소리를 죽이며 밤이 새도록 울었지요.
부부 사이는 점점 험악해져 갔습니다.
아니죠. 험악해지는 건 나뿐이었으니까요.
그는 도무지 벽창호처럼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쩌다 술기가 가시는 틈을 빌어서 나는 울음으로 호소하고 푸념하고 달래고 협박하고 위협하는 것을 그는 한없이 측은스런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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