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게 자꾸만 일을 벌여 안일(安逸)한 수도원을 시끄럽게 만드는 이 신부가「그로드노」같은 벽지(僻地)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리라 믿었던 것은 오산(誤算)이었다. 이곳 수도원의 수사들은 신부를 절대 신뢰하고 5천 부의 월간잡지를 발행하기 위해기꺼이 중노동을 해주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의 5년 동안 이 황무지「그로드노」에서 폴란드 출판계의 기적(발행 부수가 26년에는 4만5천 부였다)을 이룩한 신부는 어떤 독지가로부터 수도「바르샤바」근교의 광대한 토지를 기부받아 이곳에 숙원(宿願)이었던「니에포칼라누프」(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를 만들었다. 얼마 안 가 이곳은 폴란드의 출판업뿐만 아니라 매스콤 중심지로 되어버렸다. 1930년대 말기에「성모의 기사」지는 폴란드 말과 라띤 말로 1백만 부까지 발행되었고 35년에 창간된 일간신문은 곧 다른 신문을 도산(倒産)시켜버릴 만큼 많은 독자를 끌었다. 이 무렵 이 수도원의 지도자가 매년 1,800명에 이르렀다 하니 얼마나 대규모의 수도원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2차대전 직전 신부는 이곳에 비행장과 방송국 그리고 영화 제작소를 설치하여 현대의 모든 과학적 수단을 통한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1929년 말 신부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수사 4명과 함께「니에포칼라누프」를 설치하기 위해 미지(未知)의 나라 일본으로 떠났다. 이 일본 전교의 허락을 얻기 위해 신부의 관구장이 나눈 대화는 퍽이나 인상적이다.
『돈은 있습니까?』
『아니요』
『일본 말은 압니까?』
『아니요』
『적어도 일본에 친구나 협조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무하리만큼 맨 주먹으로 출발한 일본 전교는 피눈물 나는 노력과 기적적인 성모님의 보호로 신부의 일본 도착 1개월 만에 일본 말 잡지「성모의 기사」1만 부를 발간하고 (1930년 4월 24일「나가사끼」에 도착 5월 24일 잡지 창간) 다음해에는「나가사끼」에「니에포칼라누프」를, 몇 년 후에는 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 신학교는 원자탄의 피해를 기적적으로 모면해 아직 남아 있다) 일본 체재 중 신부는 몇 차례 폴란드를 다녀왔었는데 그때 인도ㆍ러시아ㆍ월남ㆍ중국도 방문하여 전 세계에「니에포칼라누프」를 설립할 기초를 닦았으며 1930년 8월에 한국도 종단(縱斷)하고는『원죄 없으신 성모님께서 그 언제나 이렇듯 아름다운 나라를 다스리시며 이곳에 거룩한 당신 아들 나라를 세우실 것인가?』는 편지를 동생 신부에게 보낸 일도 있다.
1936년 폴란드의 『니에포칼라누프』원장에 피임되어 다시 고국에서 제자들을 지도했는데 신부의 이 무렵 어록(語錄) 중에는 퍽 예언적이고 천사적인 것이 많다.
『사랑은 궁극의 목적을 위해서만 아니라 중간 목적을 위해서도 또 건전하고 정상적인 모든 활동을 위해서도 중요한 동기가 되며 첫째 가는 동력이 되는 법입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성모님의 뜻에 맞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원죄 없으신 성모상이「모스크바」와 중심「크레뮬린」꼭대기에 세워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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