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쉬넨스 추기경은 그의 진취적이며 개방적인 사상으로 현대 교회의 사목과 사도직에 있어 여러 가지로 훌륭한 뒷받침을 해주고 있으며 현재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창 번성하고 있는「성령운동」에도 참여, 적극 후원하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뢰벤」에서 있었던 선교사 모임에서 발표한 강연인데 이 안에 천주 성신께서 어떻게 이 명철하신 분을 일깨워 주시며 활동하고 계신지를 역력히 보여 주었다.
공의회를 준비하는 동안 많은 좋은 사상들이 강조되었는가 하면 한편 어떤 것은 뒷자리에서 그대로 묵과된 것도 있었다. 바로「선교 관심」이 그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유감스러운 일을 하나하나 분석해 본다.
1. 이제 직접 선교로써 복음을 증거하는 시기는 지나버렸다고 보아야 하는가
전교할 때에 이제는 말 없이 증거하는 것만이 용납된단 말인가? 아니면 그래도 아직은 생활하신 하느님 말씀을 직접으로 전파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침묵의 이 분위기 에서 하루 속히 헤어나야만 하겠다. 흔히들 말하기를 크리스찬은 이제 아무 말도 말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마귀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이 침묵은 악마를 다 함께 힘을 모아서 몰아냈으면 싶다. 현대 크리스찬들은 어느 때보다 하느님 말씀을 위해 생활한 증인들이 되어야 할 때이다.
물론 현 전교 상황이 그 전에 비해 많은 차이가 있고 여러 가지가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진리가 여러 가지 형태로 이해되는 데에는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진리를 전파할 때 자칫 잘못하면 균형을 잃기 쉽고 본의에 벗어나는 위험이 항상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침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때에는 조심성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취적인 것이라야 한다.『이젠 전교하는 이들은 침묵해야 한다』혹은『변론주의 시기는 지났다』고 하면서 양심의 자유를 이렇게 해설해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원래의 말과 그 뜻이 본의에서 동떨어져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어떤 말이 이처럼 그 본뜻을 떠나 달리 해설되면 희롱의 말을 하게 될 우려가 있고 따라서 그 뜻은 비본질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마찬가지로『개인의 자유 존중 때문에 개종의 시기가 지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자유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언제나 존중되어야 했고 긍정되어 왔다. 물론 과거의「내 탓」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 말씀을 전파하는 의무마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까지나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내 형제인 이웃에게 가서 온 정성과 민감과 재치로써 그들의 양심의 자유를 극진히 존중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내 이웃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잠잠하고 침묵만 지키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는 의미에서 많은 말을 건네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의 침묵은 자유 존중을 잘못 이해함에서 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증거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나 자신이 분명히 의식했다면이는 나의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내 삶과 생활의 방향과 의미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과 내 이웃을 존중시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2. 또 다른 것도 들 수 있다.「선교」라는 것을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양심의 자유 존중」이나 또는「비크리스찬 종교와의 관계」를 위한 비서실의 작용과 역할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다. 이 비서실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기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관이 우리가 자유롭게 전교할 수 있는 의무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사와 이 기관의 사명은 서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충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이들은 같은 목적을 선교사업에 있어 가진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서로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함에 있어 우리는 크리스찬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어야 함이 절대로 필요하다. 비록 오랜 세월이 걸려 점차로 그 성과가 거두어진다 하더라도 또 이에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선택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선교사업의 주목적인 초대 교회에서와 같이「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야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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