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은 한 말로 전쟁의 해요 불행의 해이다.
露日 양국 간의 평화 유지는 불가피한 사실로 악화만되어 갔다. 뿐더러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나라는 벌써 평상시의 평온을 잃기 시작했다. 여러 지방에서 수많은 불한당과 반도들이 돌고 일어나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구실로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뿐더러 日人들이 동학도들을 매수하여 혼란을 일으키도록 그들을 사수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교구통신을 보아도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소문만 같지는 않다.
교구통신 1월 7일자=『제국신문 보도에 의하면 납부 3도의 군대들이 안동에서 비밀집회를 가졌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다.』
동학도들도 전라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움직임이 충청도와 강원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서울의 지령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두목들이 임명되고 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라고들 말한다. 과장일지 모르나 어쨌든 평상시라면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될 소문들인데도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 때문에 중요성을 띨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부들은 이와 관련되는 정확한 소식을 알려주길 바란다』고 기록돼 있다.
주한 외교 사절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그들과 그들 나라 사람들을 철수시킬 수 있게 그들 나라의 해병들을 상륙시켰다. 이 같은 조처가 외국인에겐 안심을 주었으나 우리 국민에겐 더욱 불안감을 주었다. 매일 같이 서울로 일본군인의 양식과 군수품이 들어오는 것을 볼 때 국민들의 불안감은 일층 더해만 갔다.
마침내 2월 9일 제물포의 포성은 노일 간의 전쟁이 터졌음을 알렸다. 일본 군인들이 서울로 밀려들었고 백성들은 이제 말세가 온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다.
일본군인들에게 점령을 당하고 부역을 치르게 될 것이 두려워 미리 멀리 피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곧 싸움터가 압록강을 넘게 되어 피난 갔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해의 교구통신은 무엇보다도 전쟁 소식과 아울러 국내의 반란 소식으로 가득 차 있다.『아라사 사람들을 친구라고 부르면서 노국의 승리를 꽤 낙관하고 있다. 이때 노국과 불란서는 서로 동맹한 사이었다. 전쟁 직전 노국 공사가 서울을 떠나게 되었을 때 공관의 사무를 임시 불란서 공사에게 맡긴 것도 아마 그런 인연에서였을 것이다』
하루는 불란서 공사가 민 주교에게『만일 노서아의 일이 잘 진행되면 3개월 이내에 노군이 서울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고 소식을 전한 적도 있었다. 또한 교구통신도 불란서만은 노국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미영신문은 물론 독일신문까지도 일군의 승리를 믿고 있으며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동맹관계에 있는 불란서만은 일본이 결정적으로 분쇄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고들 있다』
그러므로 노불 간의 여사한 관계에서 볼 때 전쟁 당시 일군 측이 우리 불란서 신부들을 감시하지 않을 리 없었고 기회만 있으면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제국신문」은 일본계 신문의 보도를 이용하여 앞으로 조선 정부와 불란서 공사관 사이에 조인될 선교 조약이라고 하면서 소위 선교사 활동을 규정하는 협정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한편 교구통신은 근거 없는 허위 보도라고 그것을 일축해 버렸다. 선교 조약에는 선교의 자유와 선교사의 행동을 제한하는 등 선교사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련의 조처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매(Meliran) 신부와 일본 헌병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본다면 당시 선교사에 대한 일본 군인들의 적개심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교구통신의 얘기부터 들어보자.『10월 26일에 매 신부는 장연 부근의 한 공소를 방문 중이었다. 그런데 그 전날 이곳 공소 회장이 일본 군인에게 잡혀갔다. 공소 회장은 신부로부터 최후의 성사를 받기를 애원하였다. 그래서 신부는 회장이 있는 곳을 찾아나섰고 마침내 주막에서 그를 찾아냈다. 신부는 회장에게 가까이 갔으나 옆에 조선인 통역이 있어서 복사를 시켜 잠시 물러가 있도록 지시했다. 그 통역은 복사의 뺨을 무수히 때렸다. 신부가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둘 다 학대를 받고 세 시간 동안이나 감시를 당했다. 결국 일인들은 복사를 결박하여끌고 가 버렸다. 신부는 급히 진남포로 달려가서 그곳 일본 영사관에 항의했다. 겉으론 친절했으나 결국엔 안 됐습니다. 사건은 군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라는 대답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매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서 일본 참모부에 고소하였다. 복사를 석방해 줄 것과 일인 통역 조선인을 처벌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여드레가 지나서야 겨우 참모장의 회답이 민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거 10월 26일 장연에서 일본 병졸에게 타격되었다는 사건을 상세히 조사한즉 그 사실이 전혀 어긋날 뿐 아니라 도리어 일본 헌병의 직무 집행상에 방해가 된 것은 헌병 대장으 별지 보고에 의하여 명백한지라 그러므로 동인의 청원한 바는 들어주기 어렵고 또한 앞으로 그러한 일이 야기치 않도록 귀하의 설론를 바라노라. 또한 멜리잔이 인솔한 조선인은 조사한 후에 적당히 처분하겠소』
이상 일본군 참모장의 대답은 전혀 헌병 대장의 거짓 증언에만 의거한 것이었고 당시「한성신보」마저도 잘못을 오로지 선교사에게만 돌렸다. 『법국교사가 출동한 헌병에게 폭행되었다고 진남포 일본 영사관에 호소한 것은 날조이고 그의 고발은 모두 허구이다』라고.
교구통신은 결론적으로는 대일인 관계에 있어서 전교신부들에게『그와 같은 짐승들하고는 일체 상종을 하지 말 것, 특히 일본군 당국과는 여하간 관계도 갖지 않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현명책』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끝으로 이 해의 교세는 전년과 비교하면 도리어 감소되었다. 전쟁과 혼란으로 인한 어찌 할 수 없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봄 판공이 실시되지 못한 곳도 많았고 또한 실시된 곳에서도 극히 어려운 환경이어서 제대로 되기가 어려웠다. 또 황해도는 전년의 사건 때문에 아직도 혼란 중에 있었다. 그리고 매년 실시해온 신부들의 피정까지도 이 해만은 전쟁으로 취소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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