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처자식을 방치하지 않을 것 같은 기미가 느껴지고 나는 그가 이번에는 꼭 개과천선의 기적을 보여주리라 기대해 보는 것이지만 어김없이 빗나가는 날짜가 늘어감에 따라 다시는 그에게 아무런 기대조차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커가는 것은 미움뿐이고 나는 오로지 그에게서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만을 골똘하게 생각하기에 이르렀지요.
아이들이 점점 커서 이제는 학비 부담이 전 같지 않아졌습니다.
한참 돈에 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명이 현이 덕이의 등록금을 한꺼번에 내야 되었고 이잣돈 곗돈 하여 생활비를 제외한 돈 마련에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입니다.
어느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말했습니다.
『오늘, 당신한테 돈 좀 갖다주지』『네? 정말이에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반가운 소리인 것만 같았습니다. 깜깜하던 눈 앞이 훤하게 밝아왔습니다.
목 마른 자에게 내밀어 주는 한 그릇의 냉수처럼 반갑더군요. 더구나 남편의 내가 동분서주하는 안타까움을 덜어주려는 마음씨가 더욱더 반갑고 고마웠지요.
『그래, 어디서 무슨 돈이 생겨요?』
나는 훤하게 트여오는 희망을 느끼면서 그대로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음, 그림이 팔렸어』
내가 여태 들어보지도 못한 액수로 그의 그림이 팔린 것입니다.
그때의 내 심정을 아시겠지요?
이제는 그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비싼 값으로!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의 난처한 입장을 전해듣고 전에 끈질긴 혼담을 걸어왔던 A씨가 그 그림을 샀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A씨는 터무니 없는 비싼 값으로 자기의 성공을 과시함으로써 오래 전에 당했던 거절의 수모를 복수한 것인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A씨의 순수한 호의로써 지금도 고맙게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A씨와 나 사이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A씨가 누구라는 사실도 모르는 그는 아는 사람을 중간에 세워서 자기 그림을 사 가겠다는 사람에게 선뜻 그림을 내맡긴 것입니다.
물론 돈이 쪼달리는 아내를 이번만은 도와 주자는 기특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를 몰랐습니다.
그를 좀 더 알았더라면 매매에 관한 사무 절차는 내가 스스로 맡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와 주세요. 저녁 때부터 돈이 필요하니까요!』
『음 알았어』
남편은 짤막하게 자신 있게 대답하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오후 3시쯤이라니 늦어도 다섯 시쯤에는 돌아오겠지.
생전 처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쓰게 된 나는 하루 종일 들뜬 가슴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침부터 게슴치레하게 흐려 있던 하늘이 오후가 되자 억수 같은 폭우로 변하더군요.
이런 때 남편이 아니었다면 돈을 마련하려고 얼마나 쏘다녀야 했을까 생각하니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우러나와 오랜만에 적이 행복한 것 같기도 하더군요.
다섯 시가 되었으나 그는 돌아오지 않아요
그때서부터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하더군요.
생전 처음으로 받는 거액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양복에 고무신을 신은 그가 돈 꾸러미를 들고 빗속에서 우왕좌왕 하는 모습도 떠올라습니다. 교통사고는 아닐까? 혹시 단골집에서 고주망태가 되었는 건 아닐까. 설마 아무리 술 항아리에 빠졌다 나오더라도 받은 액수가 워낙 많으니 하루 동안에 탕진할 염려는 없으렸다.
여섯 시가 넘고 일곱 시가 되어서야 나는 불안한 나머지 우산을 쓰고 단골 술집으로 뛰어갔지요.
뜻밖에도 남편은 없더군요.
다달이 만나서 이제는 낯이 익은 술집 여자는 있는 호의를 모조리 드러내면서
『오늘은 웬일인지 모르겠어요. 제일 비싼 안주로 여기 있는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술값을 모조리 현금으로 물어 주시고는 일찌감치 나가시던 걸요』
사뭇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나를 쳐다봅니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더군요. 그 식으로 돈을 써 제낀다면 남아나는 돈이 무엇이겠어요.
종로 바닥의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술값을 모조리 갚아주며 다니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능히 그런 짓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가슴은 더 떨리고 초조하기만 합니다.
그러고 본다면 그가 현금으로 직접 술값을 물었다는 것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원래 우리집이 그의 학교와는 가까운 거리인지라 그는 여태 주머니에 돈이라곤 넣어 다녀본 일이 없다는 걸 그때 생각해 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동안 무던히 돈 쓰기에 굶주려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나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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